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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오징어의 기습 _ 박민규 마치 당근을 꺾듯 전화를 끊었기 때문에, 나는 어떤 항변도 할 수 없었다. 억울해서 귀가 두세 배는 커진 느낌이었고, 무엇보다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다시 다이얼을 돌렸지만 전화는 계속 통화중이었다. 딸각. 아무래도, 나를 제외한 전 세계가 통화중인 기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후, 나는 대왕오징어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딱히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이래저래 새로운 관심사들이 생겨난 것이었다. B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생이 된 후로, 우리는 아무도 대왕오징어를 논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이것이 내가 아는 대왕오징어의 전부이다. 즉 수많은 주간을 살아오면서 내가 겪은 대왕오징어의 경향인 것이다. 결국 그 보다는, 보다 보편적인 다른 경향들에 의해 나는 조금씩 .. 2012. 1. 30.
카스테라 _ 박민규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 1.문을 연다. 2.코끼리를 넣는다. 3.문을 닫는다. 2012. 1. 30.
사양 _ 다자이 오사무 작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재작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 전년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 이런 재미있는 시가, 전쟁이 끝난 직후 어느 신문에 실렸었는데, 정말로 지금 생각해 보아도, 갖가지 사건이 있었던 듯하면서도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내 가슴에 문득, 아버님과 나스 들판을 드라이브하다가 도중에 내렸을 때의, 들판의 가을 경치가 떠올랐다. 싸리꽃, 패랭이꽃, 용담, 마타리 등의 가을 꽃들이 피어 있었다. 산포도의 열매는 아직 푸른빛이었다. 그리고 아버님과 비와 호에서 모터보트를 탔을 때, 내가 물에 뛰어들자, 수초 사이에 사는 작은 물고기가 내 다리에 닿았고, 내 다리의 그림자가 호수 바닥에 뚜렷이 비쳐 움직이던 모습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문득 가슴에 떠올랐다가 사.. 2012. 1. 30.
인간실격 _ 다자이 오사무 넙치의 말투는, 아니, 세상 사람들 모두의 말투는 이런 식으로 까다롭고, 어딘가 애매하고, 발뺌이라도 하듯이 복잡미묘하며, 전혀 무익하게 느껴지는 엄중한 경계와, 무수히 많고 까다로운 술책이 숨겨져 있기에, 당혹한 저는 언제나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되어, 익살로 얼버무리거나 혹은 무언의 긍정으로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맡기는, 이른바 패배의 태도를 취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어치파 들킬 것이 뻔한데,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이 두려워서, 반드시 무언가 장식을 덧붙이는 것이 저의 서글픈 성격입니다. 그 성격은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경멸하는 성격과 비슷하지만, 저는 제 자신이 이익을 보려고 그러한 장식을 덧붙인 적은 거의 없었고, 단지 분위기가 일변하여 흥이 깨지는 것이 질식할 정도로 두려웠기.. 2012. 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