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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4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_ 김연수 엄마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의 고통을 함께한 것은 주기적으로 엄마의 몸속으로 들어가던 진통제뿐이었다. 고통 앞에서는 평생 가졌던 신앙마저도 진통제가 먼저 몸속으로 들어가리를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엄마 덕분에 삶과 죽은 사이에는 고통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고통. 엄마가 죽던 그 순간까지 나는 정신을 잃은 엄마의 손을 어루만지며 침이 마르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으나, 그 마지막순간까지도 나는 엄마의 고통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고통보다는 죽음이 더 이해하기 쉬운 모양인지, 막상 엄마가 숨을 거둔 뒤에는 그간 병상에 누워 있던 엄마와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함께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고통은 분명히 엄마와 나 사이를.. 2012. 3. 1.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_ 김연수 "그건 그 남자의 말이 맞아, 누나.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건 우연이야. 시골이라면 자연이겠지만, 도시에서는 우연이야."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남이랄 수 있는, 따져보면 육촌이 말했다. "하긴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떠들어대는 것도 말하자면 운연의 힘이랄 수 있는 거지. 오늘 아침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너란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니까. 그렇게 치면 옆에 앉은 네 아내를 만난 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어. 같은 택시에 두번 탈 확률을 생각해봐." "그러니까 우리가 만날 때는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처럼 만난다. 인연에는 우연이 없다." 종현은 아니라고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아까 소월길에서 들었던 소프라노의 목소리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어떻게 내 영.. 2012. 3. 1.
세계의 끝 여자친구 _ 김연수 뭔가를 예감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다음날 등산을 하기 위해 배낭을 꾸린 뒤 부푼 기대에 가늑 차 올려다보는 창밖의 달무리, 두 시간이나 기다려서 들어갔건만 똥이 마려운 것인지 굳은 표정으로 앉아서 내게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면접과, 밤을 새워가며 일주일 만에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과제를 모두 끝마친 뒤 제일 먼저 도착해 잠시 책상에 엎드린다는 게 한 시간이나 자고 나서 깨어나 바라보게 되는 텅 빈 강의실. 둥근 달무리나 똥 마려운 얼굴, 혹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한 시간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비록 형편없는 기억력 탓에 중간중간 여러개의 톱니바퀴가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 2012. 3. 1.
기억할 만한 지나침 _ 김연수 그녀의 엄마는 자신이 착한 여자였기 때문에 인생을 실패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엄마의 특이한 가정 교육, 그러니까 싸지도 않은 여성적인 옷들을 사들여 그녀의 옷장에 채워넣거나, 적이 안감한 색상의 아이라이너 따위를 자기 몰래 콘솔 위에 올려두는 일들보다도 엄마의 말투나 행동거지에서 드러나는 실패의 느낌에 딸로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거나 엄마의 유난스런 관심이 부담스럽다는 얘기는 아니었고, 다만 그런 과정을 거쳐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뜻이다. 그게 누구든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것들이었다. 더 아름다워지기.. 2012.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