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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사양 _ 다자이 오사무

by yoni_k 2012. 1. 30.

작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재작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 전년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 


이런 재미있는 시가, 전쟁이 끝난 직후 어느 신문에 실렸었는데, 정말로 지금 생각해 보아도, 갖가지 사건이 있었던 듯하면서도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내 가슴에 문득, 아버님과 나스 들판을 드라이브하다가 도중에 내렸을 때의, 들판의 가을 경치가 떠올랐다. 싸리꽃, 패랭이꽃, 용담, 마타리 등의 가을 꽃들이 피어 있었다. 산포도의 열매는 아직 푸른빛이었다. 

그리고 아버님과 비와 호에서 모터보트를 탔을 때, 내가 물에 뛰어들자, 수초 사이에 사는 작은 물고기가 내 다리에 닿았고, 내 다리의 그림자가 호수 바닥에 뚜렷이 비쳐 움직이던 모습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문득 가슴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역사, 철학, 교육, 종교, 법률, 정치, 경제, 사회, 그 따위 학문보다도 한 처녀의 미소가 고귀하다는 파우스트 박사의 용감한 실증.

학문이란 허영의 별명이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려는 노력이다. 


내가 조숙한 척하자, 사람들은 나를 조숙하다고 수군거렸다. 내가 게으름뱅이인 척하자, 사람들은 나를 게으름뱅이라고 수군거렸다. 내가 소설을 쓸 수 없는 척하자, 사람들은 내가 소설을 쓸 수 없다고 수군거렸다. 내가 거짓말쟁이인 척하자, 사람들은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수군거렸다. 내가 부자인 척하자, 사람들은 나를 부자라고 수군거렸다. 내가 냉담한 척하자, 사람들은 나를 냉담한 녀석이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괴로워서 무심코 신음하였을 때, 사람들은 나를, 괴로운 척하고 있다고 수근거렸다. 

무엇인가가 어긋나 있다.

결국 자살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6년 전의 어느 날, 제 가슴에 아련한 무지개가 떠올라, 그것은 애정도 사랑도 아니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무지개는 선명하고 뚜렷한 색으로 변하여, 저는 지금까지 한번도, 그것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소나기가 내린 후의 하늘에 솟는 무지개는 이윽고 덧없이 사라져 버리지만, 인간의 가슴에 솟는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부디 그분께 여쭈어 봐 주세요. 그분은, 정말로,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걸까요? 그야말로, 비 갠 뒤의 무지개처럼 생각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다고?

그렇다면 저도 저의 무지개를 지워 버려야만 하겠지요. 하지만 저의 목숨을 먼저 지워 버리지 않으면, 제 가슴의 무지개는 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저는 불량배가 좋다요. 그것도 딱지 붙은 불량배가 좋아요. 또한 저도 딱지 붙은 불량배가 되고 싶어요. 그렇게 되는 이외에, 제가 살아갈 방도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은 일본에서 제일가는, 딱지 붙은 불량배지요? 더구나, 요즈음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더럽고 추하다는 식으로 미워하며 공격한다는 말을 동생에게서 듣고는, 더욱더 당신이 좋아졌습니다. 당신이라면 애인도 많이 있겠지만, 머지않아 차츰 저 하나만을 좋아하게 될 겁니다. 어쩐지 저는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또한 당신은 저와 함께 살며, 매일 즐겁게 일을 할 수 있게 되겠지요. 




세상에서 좋은 평판과 존경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가 거짓말쟁이고 가짜라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신용하지 않습니다 .딱지가 붙은 불량배만이 제 편입니다. 딱지 붙은 불량배. 저는 그러한 십자가에라면 못박혀 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만인이 비난하더라도 저는 상대할 자신이 있습니다. '너희들은 딱지가 붙지 않은 훨씬 위험한 불량배가 아니냐.'고.

아시겠습니까?

사랑에 이유는 없습니다. 다소 억지 같은 소리를 했나 봅니다. 동생 흉내에 불과하였다는 느낌도 듭니다. 오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다시 한 번 꼭 뵙고 싶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기다림. 아아, 인간의 생활에는 희노애락의 갖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것은 인간 생활의 불과 1퍼센트를 차지하는 감정일뿐, 나저미 99퍼센트는 단지 기다리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오기를 이제나저제나 하고 가슴 조이며 기다려도, 헛일.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너무도 비참합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으리라고 모두들 생각하는 이 현실. 그러면서도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무엇인가를 기다립니다. 너무도 비참합니다. 태어나길 잘 했다고, 아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축하해 보고 싶습니다. 

가로막는 도덕을 뿌리칠 수는 없을까요?


이 책의 내용은 일단 경제학이지만, 경제학이라는 견지에서 읽으면 전혀 재미가 없다. 그야말로 단순하고 뻔한 이야기뿐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경제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나에게는 전혀 재미가 없다. 인간이란 치사한 존재이며, 또한 영원히 치사하다는 전제가 없으면 전혀 성립되지 않는 학문으로, 치사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분배의 문제이건 무엇이건, 전혀 흥미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을 읽고, 별개의 측면에서, 기묘한 흥분을 느꼇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가, 아무런 주저도 없이, 닥치는 대로 종래의 사상을 파괴하여 가는 저돌적인 용기였다. 아무리 도덕에 위배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시원스럽게 달려가는 유부녀의 모습마저 느껴졌다. 파괴 사상. 파괴는 애절하고 슬프며 또한 아름다운 것이다. 파괴하고, 다시 세워서, 완성시키려는 꿈. 물론 일단 파괴하면, 영원히 완성되는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모하는 정 때문에, 파괴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을 일으켜야만 한다. 로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 슬프고 맹목적인 사랑을 하고 있다. 





그리고 12년이 지났지만, 나는 역시 사라시나 일기 에서 한 걸음도 진보가 없었다. 도대체 그 동안 나는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혁명을 동경한 적도 없고, 사랑도 몰랐다. 이제까지 세상의 어른들은, 혁명과 사랑 이 두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쳤고, 정쟁 전에도 정쟁 중에도, 우리들은 그 말을 믿고 있었으나, 정쟁에서 패한 후, 세상의 어른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되자, 무엇이건 그 어른들이 말하는 것과 반대되는 쪽에 진정한 삶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혁명도 사랑도, 사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매력적인 것, 너무나 좋은 것이기에 어른들은 심술궂게도 우리들에게 덜 익은 포도라고 거짓말을 하였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확신한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하여 살아왔다고.



전투 개시.

언제까지고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다. 나에게는 반드시 쟁취하여야 할 것이 있다. 새로운 윤리. 아니, 그렇게 말해 봤자 위선처럼 들리겠지. 사랑. 그것뿐이다. 로자가 새로운 경제학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던 것처럼, 나는 지금, 사랑 하나에 매달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차가운 초겨울 바람이 불어닥쳤다. 전투, 개시, 사랑, 좋아한다, 그립다, 정말로 사랑한다, 정말로 그립다, 사모하니까 어쩔 수 없다,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다, 그리우니까 어쩔 수 없다, 그 부인은 드물게 보는 좋은 분, 그 따님도 예쁘다, 하지만 나는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되더라도 조금도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다, 하느님도 벌을 내리실 리가 없다, 나는 전혀 나쁘지가 않다, 정말로 좋아하니까 마음껏 뽐낼 수 있다, 그분을 잠깐이나마 뵐 때까지 이틀이고 사흘이고 길바닥에서 자더라도, 반드시. 



 

 혁명은 도대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적어도 저의 주변에서는, 낡은 도덕이 여전히 그대로, 티끌만한 변화도 없이, 우리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해면의 파도는 무언가 소란스럽지만, 그 바닥의 물은, 혁명은커녕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 채, 잠득척하며 나자빠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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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과 사랑 그리고 혁명.

개인적으로 인간실격보다 더욱 흥미롭게 읽었던 소설.
그냥 이 지문이 많은 걸 깨닫게 한다. 
무엇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 속에서 사랑과 혁명을 꿈꾸지만 그것의 회의감도 익히 알고 있는 지금.
그러나 위선자와 같이 되고 싶지 않은 지금.
딜레마. 
한 때 사랑에 빠져 나를 최악의 상태로 만들면서 까지 그 사람에게 매달려 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츠코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을 듯.
사랑도 삶도 모두 내 맘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도 사랑과 혁명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