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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11

침이고인다_김애란 자신의 경험을 어찌 이리 담담히 그리고 세세히 표현할 수 있을까. 작가라는 사람들은 피곤도 하겠다. *침이고인다_샤워기를 틀자 쏴아 - 하고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내린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순간은 바로 이런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수도 요금을 지불할 수 있다는 것, 샤워기 아래서 그것을 아주 사실적이고 감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 최고급은 아니더라도 보통보다 약간 좋은 목욕 용품으로 샤워를 하며, 쾌적함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대해 두려움 비슷한 안도감을 느낄 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을 때 말이다. *성탄특선_"모두, 어디로 간 걸까?" 추위 때문에 팽팽해진 전신줄이 휘청거린다. 라디오에선 캐나다 국경 근처의 사슴이 전.. 2012. 5. 21.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_ 박민규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사랑을 이룬 이들은 어쨌든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스무 살의 나는 생각했었다. 결국 내게 주어진 행운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서로의 이해가, 오해였음을 깨닫지 않아도 좋았다는 것... 해서 서로가 이해한 서로를 영원히 간직할 수 있었다는 것 .. 두 달이건 석 달이건, 아니 언제까지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거예요. 할아버지 정도.. 2012. 3. 17.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_ 김연수 엄마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의 고통을 함께한 것은 주기적으로 엄마의 몸속으로 들어가던 진통제뿐이었다. 고통 앞에서는 평생 가졌던 신앙마저도 진통제가 먼저 몸속으로 들어가리를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엄마 덕분에 삶과 죽은 사이에는 고통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고통. 엄마가 죽던 그 순간까지 나는 정신을 잃은 엄마의 손을 어루만지며 침이 마르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으나, 그 마지막순간까지도 나는 엄마의 고통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고통보다는 죽음이 더 이해하기 쉬운 모양인지, 막상 엄마가 숨을 거둔 뒤에는 그간 병상에 누워 있던 엄마와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함께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고통은 분명히 엄마와 나 사이를.. 2012. 3. 1.
세계의 끝 여자친구 _ 김연수 뭔가를 예감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다음날 등산을 하기 위해 배낭을 꾸린 뒤 부푼 기대에 가늑 차 올려다보는 창밖의 달무리, 두 시간이나 기다려서 들어갔건만 똥이 마려운 것인지 굳은 표정으로 앉아서 내게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면접과, 밤을 새워가며 일주일 만에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과제를 모두 끝마친 뒤 제일 먼저 도착해 잠시 책상에 엎드린다는 게 한 시간이나 자고 나서 깨어나 바라보게 되는 텅 빈 강의실. 둥근 달무리나 똥 마려운 얼굴, 혹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한 시간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비록 형편없는 기억력 탓에 중간중간 여러개의 톱니바퀴가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 2012.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