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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세계의 끝 여자친구 _ 김연수

by yoni_k 2012. 3. 1.




뭔가를 예감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다음날 등산을 하기 위해 배낭을 꾸린 뒤 부푼 기대에 가늑 차 올려다보는 창밖의 달무리, 두 시간이나 기다려서 들어갔건만 똥이 마려운 것인지 굳은 표정으로 앉아서 내게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면접과, 밤을 새워가며 일주일 만에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과제를 모두 끝마친 뒤 제일 먼저 도착해 잠시 책상에 엎드린다는 게 한 시간이나 자고 나서 깨어나 바라보게 되는 텅 빈 강의실. 둥근 달무리나 똥 마려운 얼굴, 혹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한 시간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비록 형편없는 기억력 탓에 중간중간 여러개의 톱니바퀴가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사랑은 저처럼 뒤늦게 / 닿기만 하면, 닿기만 하면 / 흔적도 없이, 자욱도 없이// 삼월의 눈처럼"















옷 속으로 빗물이 스며드는 꼭 그만큼, 그네와 미끄럼틀로 녹이 스는 꼭 그만큼, 기압골이 이제 한반도에서 조금씩 물러나는 꼭 그만큼, 내 스물다섯의 나이도 흘러가고 있엇다. 스물다섯의 고민이란 그 고민마저도 꼭 그만큼이라는 것. 원하는 만큼이 아니라 꼭 그만큼이라는 것. 


















지나가는 그 풍경 속에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았으므로 오히려 나는 숨이 편안해질 때까지, 바람이 젖은 내 몸을 차갑게 만들 때까지,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들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후드득 떨어져 내릴 때까지, 그리하여 그 구름들 틈새로 푸르스름한 하늘이 엿보이게 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데 이 글을 보니, 정말 웃긴 일이네요. 차마 같이 도망가자는 말은 못 하고, 둘이서 가장 멀리까지 가본 게 그 메타세쿼이아까지라던데, 그럼 고작 저기 호수 건너편까지 가본 게 다잖아. 그래놓고서는 어떻게 세계의 끝이라고 말할까...


그 메타세쿼이아가 두 사람이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곳이었다는 거. 


















요즘 들어서, 살아오는 동안 안 하고 넘어간 일들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청년은 아직 이게 무슨 기분일지 모를 거야. 한 일들은, 그게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마음에 남는 게 하나도 없는데, 안한 일들은 해봤자였다고 생각하는데도 잊히질 않아요. 왜, 하지도 않은 일이 잊히지 않는다니까 우수워요? 그러게, 그런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그 여자친구를 찾아가서 시인이 당신을 무척 사랑했노라고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이 시를 도서관 게시판에 붙여놓을 생각을 한 거지. 그러면 이 시를 알아보는 누군가가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무척 사랑했던 모양이죠? 그 표정을 보니.
나는 생각해봤다. 맞아요. 그랬어요. 십 년을 고사하고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떻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다음 여름에도 햇살이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다음에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가진 태풍들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바라봤다. 호수 건녀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거리에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됐다. 다시 수만 년이 흐르고 ,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르고, 그 나무는 한 연인의 사랑을 기억하는 나무일지도 모른다. 
 눈을 돌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희선씨에게 내가 말했다.
"맞아요. 그러니까...., 그렇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