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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침이고인다_김애란

by yoni_k 2012.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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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경험을 어찌 이리 담담히 그리고 세세히 표현할 수 있을까.
작가라는 사람들은 피곤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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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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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기를 틀자 쏴아 - 하고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내린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순간은 바로 이런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수도 요금을 지불할 수 있다는 것, 샤워기 아래서 그것을 아주 사실적이고 감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 최고급은 아니더라도 보통보다 약간 좋은 목욕 용품으로 샤워를 하며, 쾌적함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대해 두려움 비슷한 안도감을 느낄 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을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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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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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어디로 간 걸까?"
추위 때문에 팽팽해진 전신줄이 휘청거린다. 라디오에선 캐나다 국경 근처의 사슴이 전신주에 올라가 죽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팔리지 못한 카드 위로 루돌프가 정지된 웃음을 짓고 있는 밤. 어디선가 성가대 소년의 사탕 껍질 벗기는 소리만 바스락 들려오는 - 오늘은 일 년 중 가장 먹먹한 새벽을 만나는 날, 성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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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선을 지나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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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에서 바람을 맞으며 안내 방송을 들을 때마다 나는 구파발에도, 수색에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은 서울의 크기가 컸던 탓이 아니라, 내 삶의 크기가 작았던 탓이리라. 하지만 모든 별자리에 깃든 이야기처럼, 그 이름처럼, 내 좁은 동선 안에도 - 나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의 데시벨은 너무 낮아 누구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그때 분명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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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했던 나의 경쟁력이란 '손가락이 열 개 달린' 정도의 평범한 조건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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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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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장사를 하다 보면 별일이 다 있지만, 어머니가 기억하는 일은 그렇게 사소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손님이라는 것도 별 특징이 없었다. 어느 날 한 사내가 들어와 국수 두 개를 시켰다. 손님이 방을 원해서 어머니는 안방에 상을 봐줬다. 국수와 고추 다대기, 김치 한 종지가 전부였다. 사내는 빈 그릇을 하나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왜 그런가 싶어 사내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사내는 자기 맞은편 국수 위에 빈 그릇을 엎어놓았다. 혹여 국수가 식을까봐 그러는 거였다. 곧이어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방긋 웃은 뒤 그릇을 걷고 젓가락을 들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조용하고 친밀하게 국수를 먹었다. 어머니는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런 일상적인 배려랄까, 사소한 따뜻함을 받아보지 못한 '여자의 눈'으로 손님을 대하던 순간이었다. 밥 잘하고 일 잘하고 상말 잘하던 어머니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살면서 중요한 고요가 머리 위를 지날 때가 있는데, 어머니에게는 그때가 그 순간이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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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묵묵히 카트를 밀고 나를 따라왔다. 화장을 고치지 않은 어머니의 콧잔등은 번들거렸다. 깔끔하게 올린 쪽머리의 잔털이 하나 둘 삐져나와 푸석해 보였다. 우리는 식품 코너에 들러 어묵을 먹었다. 나는 입을 한껏 벌려 어묵을 먹는 어머니를 보고 '아, 엄마는 음식을 저렇게 먹는구나, 늘 저렇게 먹었었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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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와중에도 어머니가 거르지 않는 게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밥을 짓는 일이었다. 나는 그게 좀 이상했다. 장사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바람난 아버지를 위해 갈치를 굽고, 가지를 무치고, 붕어를 지질 수 있는지. 그것도 모두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말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엉겁결에 찾아낸 떳떳함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혹은 나 때문이었는지도. 아니면 워든 먹고 봐야해서였는지도 몰랐다. 어느 날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배곯아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년간 감당해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 오랜 세월, 어머니는 뭘 재우고, 절이고, 저장하고, 크게 웃고, 또 가끔은 팔뚝의 때를 밀다 혼자 울었다. 여자가 칼 갈아 쓰면 팔자가 드세다는데 아직까지 서방이나 새끼 잡아먹지 않은 걸 보면 괜찮은가 보다 능청도 떨면서. 생일이면 양지를 찢어 미역국을 끓이고, 구정에는 가래떡을 뽑고, 소풍날은 김밥을, 겨울에는 동치미를 만들어 주었다. 그사이 내 심장과 내 간, 창자와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음식에 난 칼자국들 역시 내 몸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나를 건드렸다. 나는 그 사실을 몰라 더 잘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