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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_ 윤대녕 소설집 보리 "요즘도 계속 그림책 그려?" 알고 있을 텐데도 준호는 그렇게 물어왔다. 아니, 모르고 있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수경은 생각했다. 용서하지 않음이 반드시 관심의 지속을 뜻하는 건 아니다. 수경은 그의 질문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궁금해서 물어온 게 아니지 않는가. 소식을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수경은 준호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준호씨는 요즘 뭐하고 지내?" 그는 담담하다 못해 당당했다. 왜, 모르고 있었냐는 투였다. 아직도 이쪽을 용서하지 못한게 분명했다. "포도주에서 영영 헤어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소주가 점점 좋아지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먹나봐. 몸은 괜찮은 거지?" 그가 재차 묻기에 수경은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게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2012. 1. 30.
보통의 존재 _ 이석원 _ 나는 손잡는 것을 좋아한다. 모르는 남녀가 거리낌 없이 하룻밤을 보내는 원 나잇 스탠드가 요즘처럼 횡행하는 세상에서도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는 행위가 여전히 특별할 수 있다는 것. 그 느낌이 이렇게나 따뜻하고 애틋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눈물겹다. 잠시 잠깐 만난 사이에서는 결코 손을 잡고 영화를 보거나 거리를 걷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으니까. 손을 잡는 다는 것은 그처럼 온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누구든 아무하구나 잘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무하고나 손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손잡는 것이 좋다. _ 내가 정말로 누군가의 관계에서 어느날 정열이 사라져 버린 상태를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사랑을 긴 호흡으로 이어갈 수 있다면... 어쩌면 나는 제대로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 2012. 1. 30.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 굿바이 외로움! 굿바이 외로움!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정해둔 규칙 같은 건 있어. 징징거리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핑계대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그 네 가지만 안 해도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 김형경 ‘꽃피는 고래’ 中 - 설 연휴를 맞이하여, 많은 분들이 고향을 찾거나 해외여행을 갑니다. 오늘 마음편지를 읽는 분들은, 고향을 찾지 못하는 분들이거나 명절 솔로들이 많으실 것 같군요. 저는 서울에서 명절을 지낸 지 오래되었습니다. 고향가는 길의 설렘은 없지만 귀성길 교통체증을 겪지 않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루 이틀, 먼 고향에 다녀오는 사람들의 피곤함을 건너뛸 수 있는 것이지요. 일요일 아침, 아내는 수녀의 길을 걷는 처제를 만나러 갔습니다. 아이의 밥상을 차려 주고 집을 청소하다 보니, 몸이 찌뿌둥 .. 2012. 1. 30.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_ 최영미 잡념처럼 아무데서나 돋아나는 그 얼굴을 밟는다는 건 웃고 떠들고 마시며 아무렇지도 않게 한 남자를 보낸다는 건 뚜 뚜 사랑이 유산되는 소리를 들으며 전화기를 내려놓는다는 건 편지지의 갈피가 해질 때까지 줄을 맞춰가며 그렇게 또 한 시절을 접는다는 건 비 개인 하늘에 물감 번지듯 피어나는 구름을 보며 한때의 소나기를 잊는다는 건 낯익은 골목과 길모퉁이, 등 너머로 덮쳐오는 그림자를 지운다는 건 한 세계를 버리고 또 한 세계에 몸을 맡기기 전에 초조해진다는 건 논리를 넘어 시를 넘어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잡념처럼 아무데서나 돋아나는 그 얼굴을 뭉갠다는 건 2012.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