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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9

세계의 끝 여자친구 _ 김연수 뭔가를 예감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다음날 등산을 하기 위해 배낭을 꾸린 뒤 부푼 기대에 가늑 차 올려다보는 창밖의 달무리, 두 시간이나 기다려서 들어갔건만 똥이 마려운 것인지 굳은 표정으로 앉아서 내게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면접과, 밤을 새워가며 일주일 만에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과제를 모두 끝마친 뒤 제일 먼저 도착해 잠시 책상에 엎드린다는 게 한 시간이나 자고 나서 깨어나 바라보게 되는 텅 빈 강의실. 둥근 달무리나 똥 마려운 얼굴, 혹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한 시간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비록 형편없는 기억력 탓에 중간중간 여러개의 톱니바퀴가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 2012. 3. 1.
기억할 만한 지나침 _ 김연수 그녀의 엄마는 자신이 착한 여자였기 때문에 인생을 실패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엄마의 특이한 가정 교육, 그러니까 싸지도 않은 여성적인 옷들을 사들여 그녀의 옷장에 채워넣거나, 적이 안감한 색상의 아이라이너 따위를 자기 몰래 콘솔 위에 올려두는 일들보다도 엄마의 말투나 행동거지에서 드러나는 실패의 느낌에 딸로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거나 엄마의 유난스런 관심이 부담스럽다는 얘기는 아니었고, 다만 그런 과정을 거쳐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뜻이다. 그게 누구든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것들이었다. 더 아름다워지기.. 2012. 3. 1.
7번 국도 _ 김연수 네 멋대로 하라 네 멋대로 하라 그것이 다만 꿈이든 삶이든,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를 한낱 바람의 자식으로 키운 모든 은혜들을 네 멋대로 하라 다만 꿈이든 삶이든 사랑하는 섬이든, 변심한 숲이든 뭐든 인더스트리어/테크노 그룹 '기형도'의 신곡 의 가사중. 매혹적인 것들은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이며 이미 온 것들은 지루하다. 우리도 이제 어른이 되고 우리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으로 바뀌어 가겠지. 그러면 자신의 모습에 많이 슬프겠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속에서 희망을 찾는 자들이 불행한 것은 이제 과거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는 내 푸르렀던 스무 살 그 무렵의 나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7번 국도는 아직 오지 않았던 것, 내가 바로 지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내게.. 2012. 1. 30.
사랑이라니,선영아 _ 김연수 _ 만약에 지금 당신이 한때 사랑했단 한 여자를 영영 다른 남자의 품으로 떠나보내게 된 것이라면 진눈깨비는 당신의 뜨거운 한 줄기 눈물을 가리려고 하늘이 찔끔거리는, 강파른 빗줄기랄 수 있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시난고난 혼자서만 사랑해왔던 한 여자와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라면 그건 '그 후로도 행복한' 삶을 예고하는 서설일 수밖에 없다. 오백 원짜리 동전을 던지면 학 그림과 500이라는 숫자 중 하나가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둘을 한꺼번에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들 단 하나뿐인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다. 진눈깨비가 비인지 눈인지 판명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다른사람에게 복채를 내놓은 일은 절대로 없어야만 한다... 2012.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