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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사랑이라니,선영아 _ 김연수

by yoni_k 2012.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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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지금 당신이 한때 사랑했단 한 여자를 영영 다른 남자의 품으로 떠나보내게 된 것이라면 진눈깨비는 당신의 뜨거운 한 줄기 눈물을 가리려고 하늘이 찔끔거리는, 강파른 빗줄기랄 수 있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시난고난 혼자서만 사랑해왔던 한 여자와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라면 그건 '그 후로도 행복한' 삶을 예고하는 서설일 수밖에 없다. 오백 원짜리 동전을 던지면 학 그림과 500이라는 숫자 중 하나가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둘을 한꺼번에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들 단 하나뿐인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다. 진눈깨비가 비인지 눈인지 판명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다른사람에게 복채를 내놓은 일은 절대로 없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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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쫀쫀하다'의 반대말은 '얼멍얼멍하다'다. 얼멍얼멍한 스웨터라면 그 털실 한 올은 옷의 일부가 되고 쫀쫀한 스웨터라면 불필요한 보풀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게 보풀 때문이었다고 악쓰면 악쓸수록 자신이 얼마나 쫀쫀한 인간인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다들 알겠지만, 그건 사람된된이의 문제지, 불길한 예감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 왜 죽음과 같은 절망에 이르는지 아는가? 그건 스스로 무덤을 팠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세상에 팔레노프시스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란 없다. 광수는 그 사실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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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에게 왜 할 말이 없겠는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이 하고 싶기 때문이지. 왜 피로연장에서 진우가 '얄미운 사람'을 부르던 부분만 기억나지 않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억하기 싫은 게 그 기억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광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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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곳도, 피 흘린 자리도 없는데 우리가 왜 실연의 상처에 아파하겠니? 실패한 사랑에는 KS마크를 찍어주지 않으니까 그러지. 낭만적 사랑의 첫 번째 테제. 우리는 서로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니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신의 사랑에 KS마크를 받아야만 한다. 두 연인이 일부일처제 가정을 꾸려 그 후로도 행복하게 살아갈 때, 낭만적 사랑은 최고의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사람들은 믿잖아. 그런데 이게 다 환상이란 말이야. 음모란 말이야. 사실은 18세기 자본가들이 발명한 사랑이란 말이야. 낭만적 사랑의 공식, 낭만적 사랑의 표준 규격이 그때 다 발명됐단 말이야. 왜 그랬겠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안그러면 인간들이 노동을 안 하니까. 니가 내 농노라면 채찍만 들어도 수만 평 고랑을 다 갈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럴 수가 없잖아? 그렇다면 무슨 수로 너를 주당 44시간씩 컨베이어벨트 옆에 세워놓을 수 있겠냐? 

너처럼 쫀쫀하게 몽그작거리는 애를 평생 매일 아침 9시까지 증권회사 석계 지점으로 출근하게 만드는 일은 병장이 이등병 머리 박게 하는 것보다 더 쉬워. 니 주민등록초본 아래로 줄줄이 이름을 등재시키면 되는 거야. 그럼 등 뒤의 태엽이 감긴 토끼 인형처럼 북을 두들기게 되지. 둥둥둥. 제게는 여우 같은 마누라가 있습니다. 둥둥둥. 제게는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습니다. 둥둥둥. 그런데 아무도 돈을 벌어오지 않습니다. 이 지경이 되면 채찍을 보여주지 않아도 자본주의라는 이 거대한 바퀴를 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뛰어든단 말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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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니가 왜 감성적인 작가로 손꼽힌다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자기 마음 하나 설명하는 데도 이건희에서 윤심덕까지 들먹여야만 하는 니가 말이다.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 아무렇지도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다, 뭐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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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등이가 아파야 하는데, 왜 이가 아프냐? 그런데 너만 보면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너는 닭고기하고 여자 중에 뭐가 더 좋냐?"

"당연히 여자가 좋지, 임마."

"그럼 어떻게 한 여자보다 닭고기에 대한 사랑이 더 오래가냐? 난 도대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니가 외로움에 못 이겨 냉동포장 닭고기를 껴안고 한 번 자보면 알게 될거다. 왜 닭고기는 평생 사랑할 수 있으면서 한 여자는 6개월 이상 사랑하지 못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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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사랑을 '맺거나' 사랑을 '이루지' 않고 사랑에'빠지는'것일까? 그건 사랑이란 두 사람이 채워 넣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집어넣어도 그 관계는 채워지지 않는다. 정열, 갈망, 초조, 망설임, 투정, 침착, 냉정, 이기심, 헌신, 질투, 광기, 웃음, 상실, 환희, 눈물, 어둠, 빛, 몸, 마음, 영혼 등 그 어떤 것이든 이 깊은 관계는 삼켜버린다. 모든 게 비워지고 두사람에게 방향과 세기만 존재하는 힘,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원초적인 감정의 움직임만 남을 때까지 그 관계 속으로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밀어 넣는 일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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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온 존재가 완전히 비워지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랑은 '나'를 무한히 확장시킨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나'는 질투로 몸이 달아 자살을 떠올리는 심약한 청년이 되기도 하고 어떤 투정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너그러운 성자가 되기도 하고 청소차가 지나가는 새벽 거리를 비스듬히 누워서 바라보는 폐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레너드 코헨의 노래처럼 권투선수와 의사와 운전수가 될 수도 있고 안치환의 노래처럼 그대 뺨에 물들고 싶은 저녁 노을이나 그대 위해 내리는 더운 여름날의 소나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이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다. 사랑의 종말이 죽음으로 비유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데, 그러면서 무한히 확장됐던 '나'는 죽어버린다. 진우의 말처럼 한 번 끝이 난 사랑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죽음은 비가역적인 과정이다. 사랑의 종말도 그와 마찬가지다. 확장이 끝난 뒤에는 수축이 이어지게 된다. 사랑이 끝나게 되면 우주 전체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확장됐던 '나'는 원래의 협소한 '나'로 수축하게 된다. 실연이란 그 크나큰 '나'를 잃어버린 상실감이기도 하다.


다락 같던 '나'에게서 벗어나 엉거주춤 관계 속에 집어넣었던 온갖 잡동사니들을 챙겨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은 우연히 발견한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장을 펼쳐보는 일과 비슷하다. 내가 그렇게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었구나, 슬픔이란 유행가 가사에나 나오는 얘기인 것처럼 늘 맑게 웃었구나, 참 떼도 많이 쓰고 참을성도 없었구나 등등의 회한이 들면서 그런 자신을 아련하게 그리워하게 된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 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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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다른 모든 일들은 나이 든 사람들이 잘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일만은 모험을 겁내지 않는 젊은이들의 전공 분야다. 젊은 이들은 아직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혼자서 빠져나올 때마다 원가를 빼놓고 나온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사랑이 될풀이될수록 그 관계 속으로 밀어 넣을 만한 게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쯤이면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더 이상 헷갈리지 않게 되는데, 그건 이제 불타는 사랑이란 자신보다 더 어린 사람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나이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소진됐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랑에 소진 될 수 없을 때, 우리는 사랑 외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서게 된다. 그래서 인류는 실연의 상처로 멸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그럭저럭 굴러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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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그 대담한 말을 통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먼저 누구인지 보여주겠다. 이번에는 네가 너를 보여줄 차례다. 그래서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다.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거나 못 들은 걸로 치거나. 못들은 걸로 치겠다, 그건 '나한테 네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마라, 우리사이는 사회적인 관계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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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랑가'를 부르며 바지 지퍼를 내리거나 브래지어 호크를 푸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일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어야만 상대방이 수많은 양반 자제 중에서 자신을 알아볼 게 아닌가?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냈다는 뜻이다. 사랑의 대상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기형도는 '그집 앞'이라는 시를 이렇게 끝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비가 2'에서는 이렇게 끝을 냈다.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


왜 기형도는 이 세상 누구와도 닮지 않은 위대한 혼자에 대한 얘기로 시를 끝맺었을까? 사랑이 끝나면 자신에 대한 사랑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저마다 위대한 개인으로 자란다. 거울에 비친 그 위대한 개인을 사랑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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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우리의 평생교육기관이다.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성인 인증을 거쳐야만 입학할 수 있는 성인들의 학교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낼 때까지 우리는 계속 낙제할 수밖에 없다. 죽는 순간까지도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할 테니, 결국 우리가 그 학교에서 졸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만 '진실로 연애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추구하는 것... 자신의 자아를 저 밑바닥까지 찾아 헤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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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입을 열먼,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다. 사랑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면 거기서 멈춰야만 한다. 너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즉 너무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방의 정체성마저 요구하는 일이다. 그건 무방비 도신의 어둠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너무 무리한 요구다. 현대적인 사랑의 방식이란 우리가 절대로알지 못하는 게 있다는 것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마도' 혹은 '어쩌면'으로 시작되는 문장의 본뜻이 'You never know'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걸 모르면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갈 수는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건 해가 바뀐 2003년 1월, 반포의 한 노래방에서 광수의 노래를 듣던 진우의 머릿속을 미친 듯이 맴돌던 문장이었다. 누구도. 누구도.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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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뿐이다. 사람도 없는 막차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집까지 가는 동안 뭐가 그리 즐거웠던지 한없이 웃었던 기억, 아파트 근처 으슥한 벤치에 어깨를 붙이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어색한 마음에 둘이서 처음 입맞췄던 기억, 자존심 때문에 공연히 투정을 부리다가 되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 그만 혼자서 울어버린 기억, 사랑이 끝난 뒤 지도에 나오는 길과 지도에 나오지 않는 길과, 차가 다니는 길과 차가 다니지 않는 길과, 가로수가 드리워진 길과 어두운 하늘만 보이던 길을 하염없이 걸어다니던 기억.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한때 우리가 뭔가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물. 질투가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사랑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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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합친 것 보다 더 큰 존재다. 예컨대 1천 송이의 꽃이 있다고 치다. 한 송이 꽃은 1 천송이 중 하나의 꽃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한 송이 꽃이 없다면 999송이의 꽃은 존재할 지언정 1천 송이의 꽃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사랑을 한다는 건 그 한 송이 꽃을 통해 1천 송이의 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 자신도 1 천 송이의 꽃이 되는 한 송이 꽃이라는 사실을 납득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