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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20

슬픔이 없는 십오 초 _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 먹고 있다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나는 길 가운.. 2013. 6. 24.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_ 허수경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오늘도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읍을 지나 신시를 짓는 장군들을 보았어요 나는 그 장군들이 이 지상에 올 때 신시의 해안에 살던 도롱뇽 새끼가 저문 눈을 껌벅거리며 달의 운석처럼 낯선 시간처럼 날 바라보는 것을 보았어요 그때면 나는 당신이 바라보던 달걀 프라이였어요 내가 태어나 당신이 죽고 죽은 당신의 단백질과 기름으로 말하는 짐승인 내가 자라는 거지요 이거 긴 세기의 이야기지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지요 2013. 6. 24.
한밤중 - 김해자 삼백 날이 다가오도록 일기 한 장 쓰지 못한 나는 삼백 날이 넘도록 울면서 시 한 줄 쓰지 못한 나는 그래서 하루의 무용담을 노래하지 못하는 나는 일 년 삼백예순 날 누군가를 위해 울지 못한 나는 이 밤중에 나의 누추를 운다 고개 돌려 나의 상처에 귀기울인 동안 겨울이 가고 어느새 나뭇잎은 무성해지고 누군가는 또 병들었다 내 앞의, 내 안의, 또 내 뒤의 고단함에 지쳐 병석에서 뱃살만 늘려온 나는 죄만 늘려온 나는 아니다 아니다 고개만 흔들어온 나는 지금 한밤중이다 한밤중 - 김해자 2013. 4. 21.
데드 슬로우 - 김해자 큰 배가 항구에 접안하듯 큰 사랑은 죽을 만큼 느리게 온다 나를 이끌어다오 작은 몸이여 , 온 몸의 힘 다 내려놓고 예인선 따라 가는 거대한 배처럼 큰 사랑은 그리 순하고 조심스럽게 온다 가도 가도 망망한 바다 풀 어헤드로 달려왔으나 그대에게 닿기는 이리 힘들구나 서두르지 마라 나도 죽을 만치 숨죽이고 그대에게 가고 있다 서러워하지 마라 이번 생엔 그대에게 다는 못 닿을 수도 있다 데드 슬로우 / 김해자 2013.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