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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20

기억의 행성 _ 조용미 기억이라는 혹은 추억이라는 이름의 그 대리석 같고 절벽 같은 견고함을 아시는지요 기억은 금강석처럼 단단합니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사라지고 신성한 모든 것은 모욕당한다 했던가요 기억은 물이 되어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고 우리가 양육해온 모든 별들은 결국 부수어지고 말겠지요 기억은 지구를 반 넘어 채우고 있습니다 지구는 기억의 출렁이는 파란 별, 지구는 기억이 파도치는 행성, 지구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기억입니다 빙산이 녹아 해마다 기억의 수위가 높아집니다 기억이 뛰어 오르거나 넘쳐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강에는 얼음이 덮이지요 수증기가 끊임없이 대기권 밖으로 빠져나가도 지구의 기억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다나 육지에서 증발한 기억은 구름이 되고 비와 눈이 되어 내리고 또 구름이 .. 2013. 6. 27.
가을밤 _ 조용미 마늘과 꿀을 유리병 속에 넣어 가두어두었다 두 해가 지나도록 깜박 잊었다 한 숟가락 뜨니 마늘도 꿀도 아니다 마늘이고 꿀이다 당신도 저렇게 오래 내 속에 갇혀 있었으니 형과 질이 변했겠다 마늘에 緣하고 꿀에 연하고 시간에 연하고 동그란유리병에 둘러싸여 마늘꿀절임이 된 것처럼 내 속의 당신은 참 당신이 아닐 것이다 변해버린 맛이 묘하다 또 한 숟가락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줄 마늘꿀절임 같은 당신을, 가을밤은 맑고 깊어서 방 안에 연못 물 얇아지는소리가 다 들어앉는다[출처] [문학일기 56] 기억의 행성/ 조용미/ 문학과지성사|작성자 그리샴 2013. 6. 27.
사는 기쁨 _ 황동규 1오디오 둘러메고 한강 남북으로 이사 다니며개나 고양이 가까이 두지 않고70대 중반까지 과히 외롭지 않게 살았으니그간 소홀했던 옛 음악이나 몰아 들으며결리는 허리엔 파스 붙이고수박씨처럼 붉은 외로움 속에 박혀 살자,라고 마음먹고남은 삶을 달랠 수 있을까? 2사는 건물을 바꾸지 않고는 바꿀 수 없는 바램이 있다.40년 가까이 아파트만 몇 차례 옮겨 다니며‘나의 집’으로 가는 징검다리거니 생각했다. 마지막 디딤돌에서 발을 떼면마련한 집의 담을 헐고마당 절반엔 꽃을 심자.야생화 밟지 마라 표지 세워논 현충원 산책길엔 도통 없는노루귀 돌단풍 은방울꽃그래, 몰운대(沒雲臺)에서 크게 눈 뜨고 만난 은방울꽃카잔차키스 묘소에 열심히 살고 있던 부겐벨리아루비보다 더 예쁜 루비들을 키우는 노박덩굴을 심자.겨자씨 비유의 어.. 2013. 6. 27.
청춘 _ 심보선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웃었을 때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그 그림자를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모래 흠모했을 때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2013.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