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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프랑수아즈 사강

by yoni_k 2013. 2. 26.




프랑수아즈 사강이 24세의 나이에 써낸 작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약관의 나이에 사랑에 대한 설렘보다 그 덧없음과 허무함에 대해 묵묵히 그러면서도 섬세하게 써내려간 필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프랑수아즈 사강이 왜 그렇게 살아야만 햇냐고 묻는다면, 그녀의 책을 읽어보라 권하겠다.

아마 그녀는 육감이 보통 사람과는 매우 달랐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섬세하게 감정을 써내려갈 순 없다.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감정에 기민해야 하고, 기억해야하며, 그것을 솔직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써내려가야 한다. 대단하다. 


나도 언젠간 느꼈었을 그런 감정. 그리고 앞으로 느낄 것 같은 그런 일들.

 내가 느끼는 감정의 크기보다 작게, 부족하게 표현할 수 밖에 없을 그런일들을 참으로 멋지게 표현해낸 그녀.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좋았다. 참으로 멋지다. 표현 하나하나 간직해두고 싶다.

좋다. 좋다. 













*


그녀는 한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녀는 완벽한 안정감과 더불어 자신이 그에게 완전히 익숙해져 있음을 느꼈다. 로제 이외의 누군가를 사귀는 일 같은 건 결코 할 수 없으리라. 그녀는 그런 안정감에서 서글픈 행복을 끌어 냈다.













*


그들은 잠시 말없이 걸었다. 가을이 아주 부드럽게 폴의 가숨에 차올랐다. 젖은 다갈색 나뭇잎들이 서로 뒤엉킨 채 천천히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팔을 잡고 있는 이 말 없는 청년에게 애정 같은 것을 느꼈다. 이 낯선 청년이, 일시적이지만 그녀의 동반자가 되어, 한 해의 마지막에 황량한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산책의 동반자든 인생의 동반자든,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언제나 애정을 느꼈다.
















*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갖고 있기는 할까? 물론 그녀는 사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때때로 시몽은 정말이지 '마음의 현'을 울리지 않는가.















*


"사실 저는 연기를 하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저는 촉망받는 젊은 변호사이자 사랑에 빠진 연인이자 버릇 나쁜 아이 역할을 연기했지요. 하지만 당신을 안 이후 제가 연기한 그 모든 역할은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


그는 움직이지 않은 채 바라보았다.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게 폴이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랑이 자기 안에서 폴을 부르고, 폴과 만나고, 폴에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겁에 질린 채 고통스럽고 공허한 마음으로 꼼작도 하지 않고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


그가 가까이, 너무 가까이에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대화를 나누기에는 늦은 시각이었다. 그는 자신을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다. 로제가 그를 보았을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시몽에게 키스했다.


겨울바람이 거리로부터 자동차 안으로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시몽은 그녀의 얼굴을 키스로 뒤엎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젊은 사내의 체취, 그 헐떡임, 그리고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런 다음 한마디 말없이 자리를 떴다. 


새벽녘, 반쯤 잠에서 깬 그녀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세찬 밤바람 때문에 자신의 머리카락과 뒤섞인 채, 부드러운 장벽인 양 두 얼굴 사이에 놓여있던 시몽의 검은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그리고 너무나 뜨거웠던 그 입술이 계속해서 자신의 온몸에 와 닿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겨울의 단조로운 나날, 고독한 그녀 앞에 끝없이 펼쳐진 집과 상점 사이의 똑같은 길들, 로제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수치심과 더불어 수화기를 든 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지독히도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전화, 그리고 영영 되찾을 길 없는 긴 여름에 대한 향수, 그 모든 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슨 일인가 일어나야 한다.'라는 절박감과 더불어 그녀를 무력하고 수동적으로 만들었다.













*


그녀는 좀 더 울고 싶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다.

익숙한 그의 체취와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자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울러 길을 잃은 기분도.



















*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중간쯤에서 몸을 휘청하더니 그녀를 향해 일그러진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한 번 더 그를 품에 안고 그의 슬픔을 받쳐 주었다. 이제까지 그의 행복을 받쳐 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느끼는 그가 부러웠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서 몸을 빼더니 짐을 놓아 둔 채 나가 버렸다. 

그녀는 그를 따라 나가 난간 너머로 몸을 굽히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몽, 시몽." 그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하지만 시몽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마치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거기에 몸을 기댔다.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