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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130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_ 최영미 잡념처럼 아무데서나 돋아나는 그 얼굴을 밟는다는 건 웃고 떠들고 마시며 아무렇지도 않게 한 남자를 보낸다는 건 뚜 뚜 사랑이 유산되는 소리를 들으며 전화기를 내려놓는다는 건 편지지의 갈피가 해질 때까지 줄을 맞춰가며 그렇게 또 한 시절을 접는다는 건 비 개인 하늘에 물감 번지듯 피어나는 구름을 보며 한때의 소나기를 잊는다는 건 낯익은 골목과 길모퉁이, 등 너머로 덮쳐오는 그림자를 지운다는 건 한 세계를 버리고 또 한 세계에 몸을 맡기기 전에 초조해진다는 건 논리를 넘어 시를 넘어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잡념처럼 아무데서나 돋아나는 그 얼굴을 뭉갠다는 건 2012. 1. 30.
문학적 건망증 _ 파트리크 쥐스킨트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의자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고, 읽으면서 자리에 앉고, 읽으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읽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오로지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발견하는 다시없이 귀중한 새로운 것에 정신을 집중한 욕망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러나 혹시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해 본다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도 인생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시는 말한다. [너는 .. 해야... , 너는... 해야...]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정확히 무엇이라고 씌어 있었는지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2012. 1. 30.
승부 _ 파트리크 쥐스킨트 그들은 당황하여 그를 주시했다. 외경심에서 그러는 거처럼 모두들 반걸을 뒤로 물러나 당혹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퀸을 희생시키고 비숍을 G7에 두다니! 모든 것을 다 알면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는 태연하고 도도하게 앉아 잇었다. 그런 그의 모슨은 창백하고 냉담하고, 그리고 아름다웠다. 그 순간 그들의 눈은 촉촉이 젖어 들고 심장은 따스해졌다. 원하면서도 자신들은 결코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그런 체스를 실제로 그가 두고 있지 않은가. 그가 왜 그렇게 두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자살하듯이 모험적으로 두고 있는 것을 어쩌면 그들은 예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들은 장과 달리 그 젊은이가 하듯이, 자신들도 당당하게 승이를 확신하.. 2012. 1. 30.
사랑이라니,선영아 _ 김연수 _ 만약에 지금 당신이 한때 사랑했단 한 여자를 영영 다른 남자의 품으로 떠나보내게 된 것이라면 진눈깨비는 당신의 뜨거운 한 줄기 눈물을 가리려고 하늘이 찔끔거리는, 강파른 빗줄기랄 수 있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시난고난 혼자서만 사랑해왔던 한 여자와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라면 그건 '그 후로도 행복한' 삶을 예고하는 서설일 수밖에 없다. 오백 원짜리 동전을 던지면 학 그림과 500이라는 숫자 중 하나가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둘을 한꺼번에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들 단 하나뿐인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다. 진눈깨비가 비인지 눈인지 판명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다른사람에게 복채를 내놓은 일은 절대로 없어야만 한다... 2012.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