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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130

세계의 끝 여자친구 _ 김연수 뭔가를 예감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다음날 등산을 하기 위해 배낭을 꾸린 뒤 부푼 기대에 가늑 차 올려다보는 창밖의 달무리, 두 시간이나 기다려서 들어갔건만 똥이 마려운 것인지 굳은 표정으로 앉아서 내게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면접과, 밤을 새워가며 일주일 만에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과제를 모두 끝마친 뒤 제일 먼저 도착해 잠시 책상에 엎드린다는 게 한 시간이나 자고 나서 깨어나 바라보게 되는 텅 빈 강의실. 둥근 달무리나 똥 마려운 얼굴, 혹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한 시간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비록 형편없는 기억력 탓에 중간중간 여러개의 톱니바퀴가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 2012. 3. 1.
기억할 만한 지나침 _ 김연수 그녀의 엄마는 자신이 착한 여자였기 때문에 인생을 실패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엄마의 특이한 가정 교육, 그러니까 싸지도 않은 여성적인 옷들을 사들여 그녀의 옷장에 채워넣거나, 적이 안감한 색상의 아이라이너 따위를 자기 몰래 콘솔 위에 올려두는 일들보다도 엄마의 말투나 행동거지에서 드러나는 실패의 느낌에 딸로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거나 엄마의 유난스런 관심이 부담스럽다는 얘기는 아니었고, 다만 그런 과정을 거쳐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뜻이다. 그게 누구든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것들이었다. 더 아름다워지기.. 2012. 3. 1.
누런 강 배 한 척 _ 박민규 굳이 이렇게 좋아야 할까 생각이 들 만큼이나 화사하고, 화사한 날씨였다. 네 개의 가시오가피 박수가, 그것을 든 한 사내의 뒷모습이 화사한 봄 속으로 사라져간다. 황사가 걷힌 하늘을 올려보며, 그래서 잘 왔다고 나는 생각을 한 것이다. 더없이 가벼이 화단에선가, 가로수에선가 꽃잎 몇장 떨어 진다, 떨어졌다. 왜 인생에선 낙법이 통하지 않는 것인가. 아들이, 그래서 아내의 전부가 되었다. 절로 이기적이고 의타심이 강한 인간으로 자라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내 책임이다. 아니, 누구의 책임인지 알 수 없다. 이제 더 줄 것도 없지만, 아니, 그래도 겨우 집 한 채가 남았지만, 더는 주지 않겠다고 나는 결심했다. 나에게도, 내 인생이란 게 있는 것이다. 치매를 앓는 아내에게도 아내의 인생이 있다. 집은 우리의.. 2012. 2. 7.
근처 _ 박민규 잘 살고 있어. 아침엔 민과장의 전화를 받았다. 10시쯤 눈을 떴으니 민과장에겐 아침회의를 끝내고 난 오전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그렇게밖에는 답을 할 수 없었다. 나도 얘기는 들었는데 ... 하고 말을 흐렸으므로 그렇지 뭐, 내가 말끝을 이어야 했다. 또 무슨 얘길 나눴던가... 잘 아는 목사님이 계시다는 얘길 들었다, 들었으므로 나는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고맙다,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또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통증도 없이 모처럼 깊은 잠을 잤다는 생각이다. 차를 끓이고, 몇장의 시디를 뒤져 바흐를 듣고, 세수를 하고, 카메라의 배터리를 교체하고... 했다. 분명 잘, 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생활이다. 돌이켜보면 옴몸을 파닥이던 붕어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게도 그런 .. 2012. 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