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_ 김연수

by yoni_k 2013. 2. 4.




_

물론 김연수 작가 때문에 읽으려고 했지만, 살 마음은 없었는데, 북커버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구입 -




_

아무 이유없이 태어난 존재는 없다.


어릴 적 미국으로 입양되어 양부모 아래에서 자란 카밀라. 그저 카밀라이기 때문에 카밀라였던 그녀, 근거 없는 결론만 나버린 자신의 삶에 대해 궁금해 할 수도 없었고, 알 수 도 없었던 그녀가 어느날 자신과 친어머니가 동백꽃. 즉 카밀라 앞에서 찍은 사진을 접하게 된다. 그제서야 자신이 왜 카밀라인지. 어쩌면 자신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어떠한 이유에 의해 태어난 사람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알아야만 하는 자신의 과거.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러 한국으로 가는데, 

그녀의 탄생과 함께 얽혀있는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카밀라의 어머니 정지은에게 일어난 답답하고 복잡한 이야기.


요즘 읽은 책 중 몰입도는 최고인 소설.

마지막까지 카밀라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궁금해 계속 읽게 되더라. 


그러는 중 관계 속에 얽힌 그 답답함.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

누구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느껴지는 H.O.P.E.


아마 카밀라는 희망. 어머니가 떠나기전 마음으로 띄어보낸 희망. 

희망.

H.o.p.e.


















_

머릿속에는 바로 문장으로 옮길 수 있는 생각들도 있었지만, 도무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혹은 막연한 공포 같은 것도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공책의 여백이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오로지 막막할 뿐이라면 그 막막함게 대해 쓰라고 유이치는 말했다.

충고를 듣고 나서도 글쓰기는 어려웠는데, 어느 날 아침 마치 말문이 트인 아이처럼 내 손이 노트 위를 내달렸다. 어느 순간 무의식적인 검열의 문이 활짝 열렸던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어떤 감정이나 평가 없이 내 생각들을 글로 쓸 수 있게 됐다. 거기에는 걱정도 있었고, 희망도 있었다. 부끄러운 문장도 있었고, 나마저 속이는 문장도 있었다 . 그 모든 것들을 다 받아 적었다. 해야 할 일도 적었고, 다짐도 적었다. 세 장을 모두 채우고 나면 팔이 아팠지만, 텅 비워낸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_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_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김종삼 _ 스와니강이랑 요단강이랑 / 이상_ 이런 시 / 박목월_ 윤사월 / 김영랑_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윤동주 _ 별 헤는 밤 / 김수영 _ 비 / 프레베르 _ 열등생


페터 한트케 _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_

너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일에 조금씩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너라는 존재를 바꿔버려도 좋을 만큼 그 점들은 중요한가? 필연적인가? 진실은 과연 그토록 중요한가?



















_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눈과 귀는 제멋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하지만 그는 괜찮냐고 한 번 더 묻지 않는다. 지금 너에게는 그런 어설픈 위로의 말 따위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게 등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전히 너는 그의 등에 몸을 바짝 붙인 채, 두 팔로 그를 잡고 있다. 지훈은 등으로 너의 존재를 고스란히 느낀다. 인간은 가여운 존재라 끊임없이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게 설사 아무런 표정도 느껴지지 않는 등이라고 해도. 그런 생각을 하니, 몸속 어딘가 딱딱하게 굳은 고형의 덩어리가 녹아내리는 것 같다고 지훈은 생각한다. 






















_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너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졌지. 그럼에도 네가 영원히 내 딸이라는게 믿기지 않는다. 내 안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네가 나왔다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경험인지 네게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있는 입술이 내게는 없네. 


네 눈을 빤히 쳐다보고 싶지만,

너를 바라볼 눈동자가 내게는 없네.


너를 안고 싶으나, 

두 팔이 없네.


두 팔이 없으니 포옹도 없고, 입술이 없으니 키스도 없고, 눈동자가 없으니 빛도 없네. 포옹도, 키스도, 빛도 없으니, 슬퍼라, 여긴 사랑이 없는 곳이네. 




















_

너는 망각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는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던 니체의 말을 떠올린다. 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인간은 잊을 수 있어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너는 양관으로 향하고 있다. 




















_

그리고 유진은 깨달았다. 첫사랑은 잊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두번째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물론 첫사랑이 끝난 뒤, 우리는 대부분 두번째 사랑을 시작한다. 











_

하지만 막상 헤어지고 나서 며칠이 지나니 그 성가심이 그리운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적적함과 불안의 차이를 여태 윤경은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어쨌거나 적적함, 혹은 불안과 성가심 사이의 적당한 온기를 지닌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중용의 아름다움 같은 거 말이다. 




















_

우리 시대의 고독이란 부유한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럭셔리한 여유가 된 거야. 고독의 재발견이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거지. 







_

하긴... 회의를 끝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윤경은 생각했다. 자신이 고립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는 이런 사회에서 스마트폰이란 얼마나 요긴한 도구인가? 스마트폰 덕분에 우리는 고립에서 벗어나 24시간 누구에게든 연결될 수 있다. 스마트폰을 들고 검지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몇 센티미터만 움직여도 놀라운 신세계가 눈앞에서 펼쳐진다. 


지금 누가 어느 맛집에서 어떤 음식을 먹는지, 막 무슨 소설을 읽었으며 별점은 몇 개인지, 여행지에서 자신이 맞닥뜨린 놀라운 풍경은 무엇이었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그 신세계에 고독을 위한 자리는 없다. 홍합돌솥밥 따위를 찍어서 친구들을 위해 트위터에 올릴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들과 나는 이 사진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되므로 나는 무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구입니다. 친분으로 연결되는 이 세계는, 그러므로 투명하다. 각자는 '우리'로 연결된다. '우리'는 기억도 공유하며, 판단도 함께 내린다. '우리'는 고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로 자살하지도 않는다.

























_

지긋지긋한 욕망, 신물 나는 외로움 따위, 마흔 살을 넘긴 사람들에게는 어쨌든 다른 호르몬이 작용한다면, 그 따위 얼굴도 없는 욕망이나 대상도 모호한 외로움 따위는 이제 영영 느끼지 못하게 하는 호르몬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_

제 영화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상징은 날개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에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못했을 테지요. 













_

그런데 왜 인생은 이다지도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건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기 때문이겠지. 처음부터 제대로 산다면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단번에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 그게 제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결정적이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수없이 저지른다는 걸 이제는 잘 알겠다. 그러니 한 번의 삶은 너무나 부족하다. 세 번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의 삶은 살아보지 않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_

그 말을 생각하면 우리라는 존재는 한없이 하잖아진다. 한 소녀가 최선을 다하기 위해 어둠 속을 달리던 그 새벽에 우리는 숙면에 빠져 있었으니까. 깨어난 뒤에야 우리는 거기에 붉은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불길은 우리를 태우지 못했고 그 연기는 우리를 질식시키지 못했다. 거기 고통과 슬픔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 아이의 고통과 슬픔이었다.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은 고통스럽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우리와 그 아이의 사이에는 심연이 있고, 고통과 슬픔은 온전하게 그 심연을 건너오지 못했다. 심연을 건너와 우리에게 닿는 건 불편함뿐이었다. 우리는 그런 불편한 감정이 없어지기를 바랐다. 그럴 수 밖에. 그때 우리는 고작 열여덟 살, 혹은 열아홉 살이었으니까. 우리는 저마다 최고의 인생을 꿈꾸고 있었으니까.
















_

이 세상에는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아니,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다는 걸. 그렇다면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한 일들은, 사랑했으나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 그가 수집하고 싶었던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일어날 수도 있었던 , 하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은 일들을 들려주는 이야기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오지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진 고통과 슬픔의 기억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고 빛바램과 손때와 상처와 잘못 그은 선 같은 것만 보여줄 뿐인 물건들.

















에밀리 디킨슨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희망은 날개 달린 것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영혼에 둥지를 틀고

말이 없는 노래를 부른다네,

끝없이 이어지는 그 노래를,


드센 바람 속에서 가장 감미로운 그 노래를.

매서운 폭풍에도 굴하지 않고

그 작은 새는 수많은 이들을

따뜻하게 지켜주리니.


가장 차가운 땅에서도, 

그리고 가장 낯선 바다에서도 나는 들었네.

그러나 최악의 처지일 때도, 단 한 번도,

그 새는 내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지 않았네.









_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깊고 어둡고 서늘한 심연이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 심연 앞에서 주춤거렸다. 심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


나를 혼잣말하는 고독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바로 그 심연이다. 심연에서, 거기서, 건너가지 못한 채, 그럼에도 뭔가 말할 때, 가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연 저편의 당신을 향해 말을 걸 때, 그때 내 소설이 시작됏다.


나의 말들은 심연 속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나는 다시 써야만 한다. 깊고 어두운 심연이, 심연으로 떨어진 무수한 나의 말들이 나를 소설가로 만든다. 심연이야말로 나의 숨은 힘이다. 


가끔,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나의 말들이 심연을 건너 당신에게 가닿는 경우가 있다. 소설가는 그런 식으로 신비를 체험한다. 마찬가지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신비를 체험한다. 두 사람이 서로 손을 맞잡을 때, 어둠 속에서 포옹할 때, 두개의 빛이 만나 하나의 빛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듯이.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 우리가 두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는 것, 혹은 당신이 내 소설을 읽는 것, 심연속으로 떨어진 내 말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