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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_ 공지영

by yoni_k 2012.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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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이들의 생애를 읽고 있으면 브레히트의 말이 떠오르곤 합니다. 죽은 물고기만이 강물을 따라 흘러간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도 가끔은 아니, 실은 자주 강물을 따라 그저 두둥실 흘러가고만 싶어집니다. 적당히 과장하고 적당히 웃고 적당히 예의바르고 적당히 감추고 싶어집니다. 세상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맘ㄹ입니다. 글마다 깨어있는 것이 명징한 삶의 징표라고 써대는 저도 가끔은 깨어있음보다 두둥실 죽어 떠내려가는 것이 훨씬 매혹적이라고 느껴집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말이지요. 






한사람을 사랑하는 작은 사랑 없이 큰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합니다. 위선이 되기 쉽지요. 작은 사랑만 보고 큰 사랑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이기적이 되고 맙니다. 저는 그래서 김남주 시인의 시를 믿었고 그를 존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멀리 있는 J. 저도 이런 사랑의 포로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은 다만 그대의 사랑만이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그대와 내가 되고 싶습니다. 내가 그냥 나여도 좋은 사랑, 서로의 사랑이 서로를 자라게 하는 사랑, 그대를 더 사랑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도 좋은 사랑, 그런 사랑을 말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내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그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라고,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키스도 침대도 빵을 나누는 것도, 보내주는 것도 사랑이라고, 다만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 사랑이라고. 제게는 어려운 그 말들을 하시고야 마는군요. 그래요.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사랑을 말입니다.





이렇게 약간 외로운 밤을 저는 좋아합니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거나 바람이 불거나 배꽃이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날, 달 밝은 날 정원이 온통 은빛으로 변하거나 정원에 돗자리 펴고 누워 유성을 일곱 개나 세어보던 날이거나 푸른 번개가 산등성으로 내리꽂히는 걸 바라보던 그날이거나, 외로움을 옆에 앉혀놓고 이렇게 혼자 소주를 마시는 밤을 저는 가끔 설레며 기다립니다.






젊었을 때 이 시를 읽었다면 저는 음, 다카무라 고타로의 정신도 감정을 좀 받아봐야겠군,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부디 웃지 마십시오. 물론 지금도 이 생각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좀 시간이 지난 후의 나라면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를 저렇게 극진한 마음으로 대해줄 그런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 J당신일까,하고. 물론 지금도 이 생각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생각하고 맙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정녕,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잠시 자신 없이 멍해 있다가, 저는 이런 생각들이 설사 이루어질 수 없다 해도 제 인생을 풍요하게 만들어주는 은총임을 깨닫고 납니다. 
 이 시를 읽으면 슬픔이 죽음 앞에서 위대해지고, 사랑이 운명앞에서 세상을 덮습니다. 겨우 레몬 한 개로 사랑의 절정과 성숙의 무르익음을 봅니다. 겨우 레몬 한 개로 죽어감이, 차마 뱉을 수 없는 슬픔이 '그처럼 위대한 생의 한가운데'로 변해 아름다움으로까지 승화되는 이유는 단 하나, 지극한 사랑 때문이겠지요. 
 멀리계시는 J, 저는 치에코보다 고타로가 더 부럽습니다. 





나이를 먹어 좋은 일이 많습니다. 조금 무뎌졌고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으며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그렇습니다. 이젠,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고통이 와도 언젠가는, 설사 조금 오래 걸려도, 그것이 지나갈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문득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학대가 일어날 수도 있고, 비겁한 위인과 순결한 배반자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한다고 꼭 그대를 내 곁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J,말하지 못했습니다만, 제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아셨으면 합니다. 몸을 굽혀 언제나 저를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던 그대. 우리가 설사 먼 훗날 둘만의 사랑을 몰래 간직한 그런 인연으로가 아니라도 J, 나는 그대와 친구하고 싶습니다. 








J, 무엇을 잃어버리는 일이 꼭 나쁜 일은 아니겠지요. 기억위로 세월이 엎이면 때로는 그것이 추억이 될 테니까요. 삶은 우리에게 가끔 깨우쳐줍니다. 머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마음이 주인이라고.








네, J.... 조금 아팠습니다. 몸도 지치고 모든 것에 의욕이 사라지고.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일부러 찬물에 가서 수영하고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그러다가도 안 되겠어서 혼자 앉아 있다가 조금 울곤 했습니다. 신기하게 눈물을 약간만 빼고 나면 마음이 좀 나아지고 그랬습니다. 마치 체했을 때 손가락을 따서 피 조금 흘리면 괜찮은 것처럼. 이유도 없고, 이해할 수 도 없는 일...마음속에 새로운 큰 갈등이 생긴것도 아닌데...
 내 몸과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증상이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진작 몸 밖으로 나왔어야 할 어둠들이 이 단조로운 생활을 통해서 겨우 밖으로 나오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곳 시골집에서의 여름나기가 이런 도움을 줄 줄은 몰랐습니다. 좀 더 단조로운 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한적한 곳으로 가야 인간이 가진 마음의 찌꺼기들이 밖으로 잘 나오게 하셨나 싶기도 했지요.








누구에게나 소주를 처음 먹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소주를 처음 머게 한 사연도 있을 것입니다. 소주를 처음 먹고 일어 났던 갖가지 화학적이고 물리적인 반응의 기억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한 인간이 청춘이었을 무렵의 일이었을 겁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평화로운 이들은 떠오르는 밝은 해나 불어가는 바람결에도 위로를 받겠지만 마음속 고통의 압력이 몹시 높아져서 어떻게든 그것을 빼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 느낄때, 저는 자주 소주를 생각합니다. 맥주도 아닌 와인도 아닌 위스키도 아닌 소주라는 그 투명한 액체를. 그것은 대개 작은 잔에 담기고 어떤 음식과도 어울리며 대체로 소박한 무대를 필요로 하고 어떤 복장과도 어울리니까요. 









그러나 J, 되돌아보면 진정한 외로움은 언제나 최선을 다한 후에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거기를 기웃거리는 외로움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신에게 정직해지려고 애쓰다 보면 언제나 외롭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럴 때 그 외로움은 나를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친구가 말했습니다. 당하면 외로움이고 선택하면 고독이라고. 우리는 한참 웃었습니다만 외로우니까 글을 쓰고, 외로우니까 좋은 책을 뒤적입니다. 외로우니까 그리워하고 외로우니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어떤 시인의 말대로 외로우니까 사람입니다.
J,  그래서 저는 늘 사람인 모양입니다.








J,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릴케를 인요하며 당신은 말씀하셨지요.

사랑이란 무턱대고 덤벼들며 헌신하여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과 미완성인 사람 그리고 무원칙한 사람과의 만남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랑이란 자기 내부의 그 어떤 세계를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들어가는 숭고한 계기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다 넓은 세계로 이끄는 용기입니다.

당신의 마지막 구절이 제 마음의 어떤 구석을 건드리고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했을까요? 하는 구절 말이지요. 
지난 몇 달 동안 마음을 정리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젊은 날, 저는 노력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바보였습니다. 공부도 했고, 시도 썼고, 글도 썼습니다. 이국의 언어도 익혀보았고 졸리운 정신을 달래가며 밤 늦도록 책상 앞에도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J, 한가지를 몰랐던게 있습니다. 사람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사람 말입니다. 마음이기도 하고사랑이기도 한 그 말.









J, 저를 위해 슬퍼하지 말아주세요. 신이 저를 사랑하시고 제가 진실에 가까이 근접하기를 원하셨다면 고만고만한 행복에 제가 머무르도록 허락하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자 할때, 불완전만큼 더 큰 동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래오래 앓았고 그러니 이제는 회복기에 들어선 환자처럼 담담하고 맑아지고 있습니다. 씩씩해지고 많이 웃을 수 있습니다. 
J,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







심심하게 앉아 천천히 책상을 정리하고, 옷장 열어서 오래된 옷들을 차곡차곡 개어놓으며, 책장 앞에 서서 곰곰이 생각하면서 처분할 책을 솎아내다가 잊었던 양서를 꺼내들고 그 자리에서 읽어도 하나도 마음이 바쁘지 않다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그래서 오래전부터 해왔던 겁니다. 철마다 천천히 장을 담가 한가하게 독을 열어보고, 한 주일에 하나씩 맛깔스런 김치 조금씩만 담아내고, 꽃씨 뿌려서 싹트는 것과 꽃피는 거 살펴보고, 하루에 한 끼는 신선한 야채와 해물로 한접시씩 요리해서 맛있게 먹기. 핸드폰은 끄고 예전에 우리가 들었던 좋은 음악을 골라 친구에게 음악 메일을 보내며 잔잔한 일상을 알리는 그런 편지를 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날의 바람 결에 관해서라든가 내리는 비를 맞고 선 가을 나무에 관해서, 밤에 관해서 별에 관해서 혹은 언젠가 우리가 밤을 새워 이야기한 오래전의 희망 같은 것을 적어보내면, 그러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내 앞에서 한없이 약한 J,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부모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원망스러웠지만 오늘은 문득 더 약해지고 싶었습니다. 멀리 뻐꾸기가 울고 봄날의 새들이 필사적으로 짝을 부르고 하늘은 더 이상의 형용사를 쓸 수 없을 만큼 짙푸른데..
J, 오늘 나는 정원에 오래도록 서 있고 싶습니다.









뭐랄까, 한가한 시간 - 요즘 제게는 그런 시간이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 맞지만 - 에 침대나 편안한 소파, 혹은 다리를 길게 뻗을 수 있는 의자 옆에 내가 좋아하는 책을 잔뜩 쌓아두고 그 곁에 커피나 녹차, 과자나 사과 혹은 오징어 같은 것을 놓는 장면, 겨울에는 따뜻한 곳에서 여름이면 시원한 곳에서. 와!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내가 굳이 밥을 안해도 되고, 보채는 아이도 없는 그곳, 책과 쾌적한 기온과 적당한 먹을거리가 있는 그곳, 제게는 그곳이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물론 여기서 사과나 커피 혹은 오징어는 빠져도 되지만 책이 빠지면 천국은 곧 무너지고 맙니다. 책과 제가 그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J, 나는 요즘 가끔 내가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봅니다.















저 사람, 심장이 터져 죽은 거야, 너무나 사랑해서 심장이 터져 죽은 거라구. 이 세상에 사랑 땜에 심장이 터져서 죽은 사람이 또 있나 싶어서, 라고.
죽기 전 쇠약해진 몸둥이로 누워서, 그녀는 시편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님을 보거든 전해다오..
내가 그대로 인해 병들었다고
... 주님 제가 드릴 것은 찢겨진 마음 뿐,
찢겨진 마음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젊은 처녀를 J, 당신은 이해하실 수 없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저는 생각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보이는 사람조차 저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그리움으로 병들고, 찢겨진 마음으로 죽어가는 것, 그것은 제가 좋아하는 안도현 시인의 그 유명한 시구를 빌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냐는 것입니다. 
J, 날이 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런 생각이 드는데, 사랑만이 내가 살아 있는, 그리고 나를 살아있게하는,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견뎌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또
언제까지나 그렇듯 삶은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푼다!
두 손 가득히 선물을 한다.
아침과 오후
황혼과 별
나무의 텀텀한 내음
강을 흐르는 푸르른 물살
빛나는 눈빛
외로움과 소음!
이 모든 것이 존재하다니 
나는 얼마나 부자인가.
이 얼마나 풍성한 선물인가.
매 시각 매 순간마다 이렇게 넘치다니!
이것은 선물, 불가사의한 선물이다.
나는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그 젓가락이라는 것은 남을 찌르지도 않고 사물의 원형을 보존한 채로 결합하며 꼭 필요한 서로인 다른 짝을 용접하거나 고리로 짜서 얽어매지도 않고 자신의 할 일을 해냅니다. 그리고 일을 끝낸 다음에는 제각기 흩어져 자신 스스로 존재하면 그 뿐입니다. 그리고 일을 끝낸 다음에는 제각기 흩어져 자신 스스로 존재하면 그뿐입니다. 게다가 그 둘 사이에는 무한한 공간이 있습니다.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것과 파트너가 되어 제 할 일을 하면 그뿐, 신발처럼 짝이 맞지 않아 멀쩡한 하나가 버려지는 일도 없을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그 둘은 짝이면서도 자유롭습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울부짖을 필요도 없겠지요. 무심히 가고 무심히 오나 서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 젓가락 하나 가지고 제가 너무 과대망상을 떨었나요?















frei-aber-einsam, 그러니까 자유로이 그러나 혼자서, 라고 번역할 수 있을까요? 요즘의 저를 말해주는 단어 같아서 한참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J. 실은 오래도록 나를 찔러댓던 내 과거들의 비수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찌를가 겁이 납니다. 내 어둠이 당신의 영혼에 물들까 겁이 납니다.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다 고갈된 것만 같은 두려움과 날마다 싸우고 있습니다. 더 깊어지고 싶은데, 더 깊어져서 자갈과 물고기의 주검들을 지나 더 깊은 곳에 두레박을 내리고 싶은데, 저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였던가요. "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오직 한가지, 나의 고통이 가치를 상실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던 이가. J, 저의 두려움도 하나입니다. 나의 고통이 나를 무디어지게 만드는 것, 다 그런 거라고 쉽게 말해버리게 하는 것, 이 세상에 사랑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해버리게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