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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대설주의보 _ 윤대녕 소설집

by yoni_k 2012. 1. 30.








보리

"요즘도 계속 그림책 그려?"

알고 있을 텐데도 준호는 그렇게 물어왔다. 아니, 모르고 있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수경은 생각했다. 용서하지 않음이 반드시 관심의 지속을 뜻하는 건 아니다. 수경은 그의 질문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궁금해서 물어온 게 아니지 않는가. 소식을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수경은 준호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준호씨는 요즘 뭐하고 지내?"

그는 담담하다 못해 당당했다. 왜, 모르고 있었냐는 투였다.

아직도 이쪽을 용서하지 못한게 분명했다.





"포도주에서 영영 헤어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소주가 점점 좋아지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먹나봐. 몸은 괜찮은 거지?"

그가 재차 묻기에 수경은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게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관계란 무엇일까.






"남자가 생긴 게 틀림없어, 그렇지?"

'저 지금 자고 있다니까요.'

"그래 , 보내주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건 또 왜 그런 거죠?'

"아직 널 사랑하고 있으니까. 우린 7년이나 만나왔어."

'하지만 남들처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관계잖아요. 그리고 이제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잖아요. 지금이라도 집을 돌려드리고 싶어요. 실은 그 집에서 함께 살고 싶었어요. 단 한 달이라도 말예요. 그런데 당신은 결코 기회를 주지 않았죠.'

"네 마음대로 왔다가 네 마음대로 가는 게 아니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수경의 얼굴에 그토록 오래 기다렸던 미소가 번졌다. 그에게 더이상 미련이 남지 않게 된 것이다. 극 다시 보리!라고 머리맡에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마친내 수경의 눈에 참았던 눈물이 고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스스로 구원받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이제 혼자여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수경은 몸을 돌려 차갑게 식은 그의 등을 부드럽게 끌어 안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애타게 속삭였다. 아침이 오면 당신과 헤어져야겠지만, 내 어찌 너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또한 보리라는 이름을 내 평생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대설주의보 

책을 폈으나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아 도로 쌓아두려는데, 누군가 여백에 볼펜으로 끼적거려놓은 글자가 보였다.


능히 보낼 수 있는 자는 내가 아니요. 보내지 못하는 자는 이 또한 내가 아니고 누구인가? _ 능엄경


윤수는 96년 여름 해란과 백담사에 들렀다 속초로 넘어가, 밤늦게 대포항에서 저녁을 먹고 근처 호텔에서 보냈던 밤을 떠올리고 있었다.


늘 그리워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가 있다.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  

 "그리고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될 겁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있으니까요."

왠지 그러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올 사람은 결국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오대산 하늘 구경  

장점이 상대방에게는 단점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아요. 누가 봐도 99점이지만 바로 그 점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나는 80점 정도면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나머지는 유동적으로 비워놓는 거죠. 그 유동성이 실은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부분이잖아요.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내게는 비합리적이고 비물질적인 관계가 필요해. 부부 관계를 포함해 늘 거래에 지쳐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