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17 _ 황경신

by yoni_k 2012. 1. 30.


나의 투쟁은, 그리움에 몸을 바치며, 나날을 헤어나가는 것. 라이너 마리아 릴케




 

"클래식한 데이트?"

니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그래, 아주 클래식한 데이트."

"예를 들면 카페에서 기다리는 거. 기다리는 동안 보려고 가벼운 책 한 권을 갖고 가지만, 내용은 머리에 안 들어오고 자꾸만 문 쪽으로 눈이 가는거. 누가 들어올 때마다 깜짝 놀라고 실망하는거. 그 사람이 도착할 때쯤 심장이 먼저 알고 울리기 시작하는 거. 만나면 환하게 웃어주는 거. 별거 아닌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거. 같이 볼 영화 미리 예매해놓는 거. 그리고 어두운 영화관에서 두근거리며 살짝 손잡는 거. 그런거, 시시하니?"









니나가 알기로, 시에나는 절대적으로 좋은 것도, 절대적으로 싫은 것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언제나 이것은 이것대로, 저것은 저것대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 모든 것들이 이리저리 섞여 있다. 마치 지금 냄비 속에서 함께 어우러져 끓어오르고 있는 물과 올리브오일처럼. 금을 긋고 이쪽과 저쪽으로 나는 것을 그녀는 싫어한다. 하지만 만약 시에나가 그런 소릴 듣는다면 그렇게 나누는 것에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다고 얘기할 것이다. 










"기억이라는 건 순서에 따라 차곡차곡 쌓이는게 아니야. 만약 그렇다면 오래된 기억들부터 차례로 잊혀지겠지? 그런데 기억들은 언제나 순서를 어기고 뒤죽박죽 되거든.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엉둥한 곳에서 엉뚱한 기억이 불쑥 솟아오르는 거야.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수간, 이를테면 꿈 같은 데서 말이야.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 느낌은, 뭐랄까, 그래, 마치 멀미 같은 거야. 그 기분 알지? 머리가 아프고 멍해지고 세상이 흔들리고 심장에 커다란 추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거북해서 토해버리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되고. 그냥 그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아주 무기력하게. 그냥 울면서." 








"말이란 건 있잖아, 그 내용보다는 그 이야길 할 때의 느낌이랄까, 그런 것고 더 가까울 거야. 상처를 주지 않겠다, 라는 건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기분인 거지. 생명이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상처를 주고 또 받는 거라고 생각해. 다른 생명으로 부터 생명을 빼앗고, 또 뺏기면서. 그러니 열심히 살아야지."









시에나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사랑까지도 해보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 대상이 몇 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 사람 속에서도 수백, 수천의 사랑이 머무르고 사라지고 변화할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삶은 흐른다.'

'그리고' 앞에 생략된 무수한 것들에 대해 이제 와서 왈가왈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흐른다' 후에 따라올 수없이 많은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알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는 슬퍼졌다. 무한하고 무의미한 슬픔이 그를 내리쳤다. 그 슬픔이 반복되는 생 대문인지, 흐르는 삶 때문인지, 안나와의 이별 때문인지, 어느 날 문득 집으로 돌아오기를 멈춘 어머니 때문인지, 그는 잘 알 수 없었다. 









"첫 번째 라는 건 가끔 바뀌기도 하잖아. 그만큼 좋아하면, 그만큼 상처를 받기도 하니까, 어느 날 문득 감당할 수 없게 되거나 지겨워지면 그것으로부터 도망쳐버려. 하지만 두 번째는 늘 그 자리에 있고, 좀처럼 바뀌지도 않아." 








"쓸쓸할 때는 슬픈 음악을 듣게 된다고,  얘기한 적 있었나?"

"시에나는 지상에서 가장 슬픔 음악이 뭐라고 생각해요?"

"글쎄, 에바 캐시디가 부르는 <Autumn leaves>나 피아졸라의 탱고, 찰리 헤이든의 콘트라베이스와 팻 메시니의 기타가 함께한 곡들, 그리고 .... 지네트 느뵈의..."


"흔히 하이페츠가 연주하는 비탈리의 샤콘느를 지상에서 가장 슬픔 은악이라고 하잖아?"













" 날 사랑하나요? "

니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소리가 되지 못한 채, 니나의 마음속에서만 맴돌았다. 수백 번 혹은 수천 번 정도 회오리바람을 그리며 맴돌았다. 그렇게 맴돌기만 한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해줄 사람은 없다. 그래서 질문은 언제까지나 홀로 남아버렸다. 꿈에서조차, 니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건 그저 홀로 남아버린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건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다고, 긴 시간이 흐른 후에 시에나는 생각했다. '날 사랑하나요?'라는 말을 꺼낸 순간, 사랑으 재빨리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공허만 남아 있게 되라라는 걸, 시에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어느 쪽이래도 상관은 없었다. 어쩌면 제대로 된 대답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질문은 그런 거였다. 질문 그 자체로 완결되어야만 하는데, 또한 완결될 수 없는 본성을 지니고 있는 거였다. 

















" 시작해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생각해볼 사이도 없이, 이미 시작되어버리는 일들이 있어."

낮은 목소리로, 시에나가 말한다. 

"그래서 언제나 노력이 필요해."

"무슨 노력이요?"

제이가 묻는다.

"사랑받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노력."
















'왜 사람들은 모두 떠나버리는 것일까.' 니나는 생각했다.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 의지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어째서 영원히 곁에 머물러주지 않는걸까? 왜 가장 필요한 순간, 가장 의지하고 싶은 순간에 사라지는 것일까? 그들을 사랑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에, 아무 예고도 없이, 잡을 수 없는 곳으로 훌쩍 가버리는 것일까.?' 







"충분히 받을 만큼 받고, 견딜 만큼 견뎌내고, 그래도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일 만큼 다독였는데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말해요. 그리고 용기를 내어 다시 시작하기 직전, 거대한 공포와 죽음처럼 캄캄하고 적의에 찬 침묵이 우리를 단단히 결박하죠." 










"무색무취, 줄곧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이 나의 인생에 개입하는 게 두려웠고, 나 역시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가끔 아주 비싸고 맛있는 초콜릿을 사기 위해 멀리까지 가곤 하지만, 그렇게 사다놓은 초콜릿들은 몇 년째 그대로 쌓여있어요. 꽃은 사지 않아요. 모든 종류의 푸른색을 좋아해요. 하지만 무언가가 너무 좋아지지 않도록, 늘 긴장하고 있어요. 좋아하게 되는 순간, 슬퍼지고 외로워지니까요. 그리고 몇 년 전, 한 사람을 만났어요." 









"다만 그때까지의 내 삶은 너무나 얇아서, 너무 쉽고 간단하게 그의 인생으로 휘말려 들어간 것뿐이에요. 그런 식으로 행복해질 수 없나는 건 알았지만, 내가 불행하다고 울거나 소리칠 수 도 없었어요. 나는 그의 삶 속에 용해되었고, 사라졌어요.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사람들이 알고 있다면, 문제는 좀더 간단해 질 텐데요."

"맞아요, 슈테른. 맞아요.... 나는 정말 잔인했어요."














"그 사람과 헤어진 지 얼마나 됐습니까?"

"글쎄요... 매일 아침 깨어날 때마다, 마치 어제 이별한 것처럼 심장이 아파요.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여겨져요. 이 생이 아닌 다른 생이나 꿈속의 기억인 것처럼."














"그런데 당신은 지금도 달에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해요?"

"모든 것이 앞면과 뒷면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남과 이별, 슬픔과 기쁨, 희망과 절망, 기억과 망각, 다시 만남과 이별..."

"달의 뒷면에는 뭐가 있을까요?"









남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충실히 살고 있지 않으며 위험에 직면하고 있기도 하다. 아아, 그들이 자기를 극복하고 사랑하는 사람드링 되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주위에는 확신이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아무도 의심의 눈으로 보지 않으며, 그들 자신도 자신들의 비밀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내부에서 비밀은 완전한 것이 되고, 그들은 마치 나이킹게일처럼 모든 비밀을 노래한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잘가요, 안녕. 이별은 감미로운 슬픔.

내일이 될 때까지 '안녕'이라는 말만 되뇌고 싶어요.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사람이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일, 호감을 느끼는 일,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일, 그런 일들은 언제들지 일어날 수 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서 어느 특별한 한 사람을 그 대상으로 삼게 되는 걸까. 

 '사랑의 유통기한은 삼백 일'이라는 이론을 내놓을 것은 미국 코넬대학의 신시아 교수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사랑에 빠져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상태로 지내는 기간은 십팔 개월에서 삼십 개월이고, 일년 정도가 지나면 오십 퍼센트 이상의 열정이 사라지는 게 정상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은 네가지 호르몬이며, 이성고 ㅏ지성을 관할하는 도파민,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을 느끼게 하는 페닐에틸아미, 격정에 휩싸이게 하는 에도르핀, 그리고 성적 만족감을 높여주는 옥시토신이 그 호르몬들이라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세상에 정말 운명의 상대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상대를 항상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정신이 각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찾아온다. 기쁨이나 슬픔, 아픔이나 불안, 고통 등으로 인해 완전히 깨어 있을 때,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서도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직후 다른 사랑에 쉽게 빠지는 것으 그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 열정이 식는 것, 도 다른 사랑을 찾는 것, 이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다. 













"두 사람, 이제 어떻게 될까?"

니나의 말에, 비오는 잠깐 생각하고 대답한다.

"아주 클래식한 연인이 될 거야, 두 사람은."

"아주 클래식한 연인?"

"손을 잡고, 같은 곳을 보고, 서로 의지하고, 슬플 때는 노래를 불러주고, 마음껏 울 수 있도록 가슴을 빌려주고, 가끔 오해를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오해가 풀리면 활짝 웃으면서 꼭 껴안아주고, 같이 나이 들어가고, 누군가 따라오지 못하면 기다려주고, 마음 졸이지 않고, 지나치게 드라마틱하지 않고, 일 초는 일 초의 무게로, 한 시간은 한 시간의 무게로 흘러가고,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책을 보고, 서로의 다른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너무 많은 기대하지 않고, 원망하거나 불신하지 않고, 함께 변해가고, 가끔 다른 길을 걸어가지만 다시 만나는... 모든 것에 대해솔직한, 모든 것에 대해 진심인.... 그런 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