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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핑퐁 _ 박민규

by yoni_k 2012. 1. 30.


어느 순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해졌다. 더 나빠질 게 없다고 느끼는 순간, 불안이란 감정 자체가 사라진 것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삶이 그래서 시작되었다. 














세상을 끌고 나가는 건 2%의 인간이다. 


입버릇처럼 담인은 그런 얘길 했는데 , 역시나라는 생각이다. 치수를 보면, 확실히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다. 출마를 하고, 연설을 하고, 사람을 뽑고, 룰을 정하는 - 좋다. 납득 한다. 이 많은 인간들을 누군가는 움직여야 하는 거니까. 수긍한다. 나머지 98%의 인간이 속거나, 고분고분하거나, 그저 시키는대로 움직이거나 - 그것은 또 그 자체로 세상의 동력이니까. 문제는 바로 나 같은 인간이다. 나와, 모이이 같은 인간이다. 도대체가 

 

 데이터가 없다 .생명력도 없고,동력도 아니다. 누락도 아니고, 소외도 아니다. 어떤 표현도 어떤 동의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살고 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휴우, 땀을 닦으며 다시 소파에 앉았을 때는 결리던 어깨와 허리가 시원하게 나은 느낌이었다. 저기, 말이야 ... 그때 일... 그거 미안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면, 억지로 삼켰던 탁구공 같은 것이 입 밖으로 나와 통통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잖아. 공을 주워 돌려주는 느낌으로 모아이가 얘기했다. 그 공을, 나는 말없이 받았다. 작지만 희고 눈부신 공이였다.  









나는 혼자다. 늘 마흔한명 속에 앉아 있지만, 또 육백삼십칠명의 졸업앨범에 나란히 사진을 넣기도 하지겠지만, 실은 천구백삼십사명과 오만구천이백사명과 육십억의 인류가 나를 둘러싸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  결과는 마찬가지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내가 말을 걸 수도 없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렇다. 아무리 생ㄱㄱ해도 이건 잘못된 일이다. 누구에게나 이름을 알고, 매일 얼굴을 봐야만 하는 마흔한명 정도의 인간들이 있다. 마흔한명 정도의 그 인간들이, 실은 그래서 천구백명과 오만구천명, 나아가 육식업 인류를 대표해 한 인간과 대면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독하다 . 과연,


니들이 인류를 대표한 거냐?













조용하고 착한 애였어요. 믿기지 않아요. 왜 좀더 잘해주지 못했나 후회가 돼요. 끝끝내 버튼을 누루지 않은 까닭은 - 치수 때문도, 혹시 남아 있을 내 삶의 희망 때문도 아니었다. 눈물을 닦으며 다시 수업에 열중할 마흔한명의 <다수인 척 > 때문이었다. 스스로는 단 한번도 나를 괴롭힌 적이 없다 믿고 있는, 그러니까 인류의, 대표의, 과반수, 조용하고 착한, 인류의 과반수, 실은 더 잘해주고 싶었을, 인류의 대다수.  











뭐가? 인류는... 그러니까 그 결과라는 너나 나는 ... 돈을 주고 나면 이제 행복할 수 있을까...안심해도 될까... 그래서 그럭저럭이라도 졸업을 하고... 살고... 겨우 어떻게라도 어디든 대학같은 델 가고... 눈에 띄지도 않겠지만... 열히 하고... 해서 면허 같은 걸 따고... 취직을 하다든가... 무난한 옷을 입고... 무난한 취미를 가지고... 절대 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그렇게 유전자를 보존하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면.. 행복할까? 물론 그것도 평균 이상으로 운이 좋을 때의 얘기겠지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렇게 ... 살아도 될까... 행복할까? 








그런데 모아이, 세상엔 매수되는 게 오히려 다행인 인간들이 얼마든지 있어, 이를테면 


나 같은 인간이지


펭귄도 실은 누군가 매수만 해준다면, 당장 알래스카를 떠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지도 몰라. 알겠니? 대부분의 인간들은 - 매수 - 를 안해줘서 억울하고 불만이 생기는 거란 말야. 나만해도 만약에 네가 - 매수 - 만 해준다면 평생 탁구를 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어... 어느 정도는... 말이야. 어느정도는?


어느, 정도는












 나는 꼭, 이를테면 저런 <출구> 같은 걸 보지 못한다. 그런 경우가 즐비하다, 허다하다, 아니 늘, 그렇다. 왜 그럴까? 






물을 마시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지고, 말이 하고 싶었다. 말이, 이상하게도 말이, 그래서 나는 아황산가스와, 배출과, 일산화탄소와 그런 것들을, 또 토요일의 공원과 쇼핑과 애플주스를 걷어낸 치수의 이야기를, 매수를, 디디티를, 다수결을, 마리를 노인들을, 배제를, 건성을, 슬림을 피고, 다리가 휘고, 분홍의 국수나 이런 것들을, 푸래파래숀 H를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었다. 무척 말하고 싶었던 그것들을, 그러나 말로 만들 수 가 없었다. 








적응이 안돼요

다들 결국엔 자기 할 말만 하는 거잖아요

얘길 들어보면 누구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어요

왜그럴까요. 왜 아무도 틀리지 않았는데 틀린 곳으로 가는 걸까요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누구의 책임일까요

무엇보다

그걸 용서할 수 없어요

60억이나 되는 인간들이

자신이 왜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걸 용서할 수가 없어요









얘야 세계는 언제나 듀스포인트 란다. 이 세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그것을 지켜봤단다. 그리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쳤어. 어느 쪽이든 이 지루한 시합의 결과를 이끌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아직도 결판은 나지 않았단다. 이 세게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흑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구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 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792629921: 17383457926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세계는 과연 듀스 스코어, 좋은 일은 결코 연거푸 일어나지 않는다.   

 










그보다 다수인 척 - 학원을 다니고 학교를 다니고 방학을 보내고 - 돌아와 또다시 여전한 생활을 할 나는, 여전한 생활을 할 너는, 여전한 생활을 할 우리는 -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이 육십억의


불특정 다수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도 곧 마지막이 아닐까? 델몬트를 마시며 모아이가 말했다. 고등학생이되면 그런 생각조차 깨끗이 사라질걸.










 우린 럭키한 걸까? 모아이가 중얼거렸다. 이 세계엔 여전히 가뭄과, 학살과, 재해와, 분쟁에 시달리는 인간들이 있지만 우리는 안전하다. 안전한 나라의 시원한 실내에서, 지금 이렇게 주스를 마시지만 이것이 럭키,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좋지도 나쁘지도,이를테면 따에 걸리지 않은 마흔한명의 삶을, 육백삼십육명이나 육십억의 생을 럭키, 하다고 할 수 있을까?  
 








즉 너와 나 같은 인간들은 그냥 빈 공간이란 얘기지. 그렇지 않을까? 즉, 보이지 않는거야. 멀리서 보면 그저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공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렇게 존재해. 그럼 우린 뭘까? 보이지도 않고, 아무 존재감 없이 학살이나 당하고.. 영문도 모른  채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고... 뭐 그래서 서로에게 의지하기도 하지만... 실은 우리도 200km는 떨어져 있는 탁구공과 같은 게 아닐까? 또 그 사이는 역시나 비어 있는 게 아닐까? 왜일까.. 말하자면, 어쩌라는 걸까? 그런 공간, 즉


보이지도 않는 존재들인데, 왜 이렇게 노력해야 하는 걸까? 이토록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우주의 대부분인 빈 공간들이.. 어떤 노력을 한다고는 볼 수 없잖아. 그런데도 이곳은 우연일까? 이곳에 존재하고, 서소를 견제하고, 진보와 발전을 거듭하고, 자원을 이용하고, 구분하고, 차별하고, 우월해지고, 뺏고, 차지하고, 죽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살기 위해서? 이렇게 빈 공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저 어둠처럼

 

 왜 우리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는 걸까? 왜 우리는 반드시 생존해야만 하는 걸까? 어떤 우연이 우릴 그렇게 고안한 걸까? 인체를 통해 태어나고 길러져야만 인간일까? 반드시 그래야만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영문도 모른 채 남아서 뭘 하려는 걸까?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곳에서..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말이야.








인간의 해악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은 거야. 그것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다들 다수인 척하는 거야. 이탈하려 하지 않고, 평형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전쟁이나 학살은 그 에너지가 직렬로 이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  








이상하리만치 무더운 날씨가 이어졌다. 모아이도 나도, 반판을 입어야 할 정도였다. 이런 날씨를 인디언 써머라고 하죠.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사냥을 할 수 있었던 까닭에 인디언들은 이 시기를 신의 축복이라 믿었다네요. 여자 아나운서의 빛 고운 해설이 없엇다 해도, 하늘을 올려다보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가며, 나는 마지막 사냥을 나서는 인디언처럼 창밖의 하늘을 음미하고는 했다. 그 하늘 밑에서


다들 열심히 살고 있었다. 

말하자면

아무도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도 잘못하지 않은 가을이었다. 











못, 여기 온 후로 나는 줄곧 그런 생각을 해왔어. 왜 우리일까? 답 같은 건 찾을 수도 없겠지만, 내 결론은 그거야. 뭐?


너와 나는 세계가 <깜박>한 인간들이야.








 쎌러브레이션을 부르는 쿨 앤 더 갱을 보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어때, 결정을 하겠니? 쎄그라탱이 물었다. 모아이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서로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말했지만, 더 많은 시간을 가져도 괜찮아. 세끄라탱이 속삭였다. 어떻게 할까? 나는 모아이에게 물었다. 아마도


고등학생 정도로 부패한다면


지금과 같은 생각은 못할 것 같아. 내생각도 그래.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세끄라탱 앞에 섰다. 물끄러미 우리를 들여다보던 세끄라탱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보았다. 언인스톨?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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