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청춘의 문장들 _ 김연수

by yoni_k 2012. 1. 29.













_

내게 삶이라는 건 직선의 단순한 길이 아니라 곡선의 복잡한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때다.그게 사랑이든 복권이든 당첨이든, 심지어는 12시 가까울 무렵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든 기다리는 그 즉시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효율성과 경제성의 시각으로 냉정하게 검토하자면 삶이라는 건 대단히 엉성하게 만든 물건이다. 원하는 모든 것을 원하는 순간에 얻을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깔끔할까? 그렇다면 술에 취해서 통화를 거부하는 사람의 음성사서함에다 대고 질질 짜는 소리를 한다거나 고작 변 심한 애인 때문에 M16A1 소총이라는 무시무시한 흉기를 들고 사회에 나온다거나 피곤한 하루를 역시 피곤한 운전기사와 함께 버스의 배차간격의 문제점이라는 묵직한 주제로 토론하며 끝내는 일 따위는 없어질텐데.


p.33

























_

서울과 달리 제주도는 여름과 가을 사이의 맑은 날이 계속 이어졌다. 구름의 모양은 바람에 따라, 바다의 빛은 햇살의 각도에 따라 순간순간 바뀌어갔다.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 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 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쓸데없다고 핀잔준다 해도 내 쓸모란 바로 거기에 있는 걸 어떡하나.

 

p.53 
























_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오직 그 문장에만 해당하는 일을 나는 하고 있었다.

 

그 소설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그 소설로 인해 내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그 문장뿐이었다. 파스칼의 회심回心과 같은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라는 문장에 해당하는 행귀가 어떤 것인지 단숨에 깨달으면서 파스칼의 지복과 비슷한 감정을 잠시 느꼈다는 말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때 바라본 밤하늘을, 그때 느꼈던 따듯한 고독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가? 그건 우리가 살면서, 또 사랑하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모세를 닮은 재벌 3세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내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남산 꼬대기에 세워 준다고 해도 나는 그 일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다.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그 일들을 잊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살아가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문학을 한다. 그 정도면 인간은 충분히 살아가고 사랑하고 글을 쓸 수 있다.

 

 나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에게 큰 관심이 없다. 내가 꼭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도 흥미가 없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만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조금만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왜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 따위에는 애당초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 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p.66-67



















_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흘러서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높다른 마루에서 거울을 보고 백발을 슬퍼하는 것을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가 저녁에 눈처럼 된 것을

 

장진주[將進酒]_이백



개띠라든가, 혈액형이 A형이라든가, 막내라든가, 별자리가 양자리라든가, 이런 것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준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에 따르면 나는 성급하고 인내심이 부족하고 쉽게 싫증을 내고 이기적인 유형에 속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똑같이 생긴 돌이 없듯이 같은 유형의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유형일 뿐 입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여 있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날, 서귀포에 폭설이 쏟아졌습니다. 눈은 떨어져 금방 녹아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폭설은 오랜만이라고 서귀포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우리 삶이란 눈 구경하기 힘든 남쪽 지방에 내리는 폭설 같은 것, 누구도 삶의 날씨를 예보하지는 못합니다. 그건 당신과 나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잠시 가까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우리는 아마 다른 유형의 인간으로 바뀔 것입니다. 서로 멀리, 우리는 살아갈 것입니다.

 그걸 슬퍼하기 전에 얼른 시집을 펼칩니다. 당나라 시인 왕창령의 [부용루에서 신점을 보내다]

 

가을비 내리는 강을 따라 밤새 오나라로 들어가고

그대를 보내는 새벽 초나라 산들이 외롭다.

낙양의 친구들이 안부를 물어보면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 옥병에 간직했다고 하게.

 

누군가 안부를 물어보면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 옥병에 간직했다고 전해주세요. 부디.

 

p97



















_

<long distance flight>를 들으며 나는 잊혀지는 것도 그렇게 아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잊혀진 것들은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p118 




















_

서른 살 너머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더라면

스무 살 그즈음에 삶을 대하는 태도는

뭔가 달랐을 것이다.


다음날, 이삿짐 트럭을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나는 그 언덕에서의 삶이 내겐 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꽃 시절이 모두 지나고 나면 봄빛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천만 조각 흩날리고 낙화도 바닥나면 우리가 살았던 곳이 과연 어디였는지 깨닫게 된다. 청춘은 그렇게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면서 가버렸다. 이미 져버린 꽃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p132


























_

스카이 웨이 너머로 해가 떨어진 뒤, 지친 몸으로 직장에서 돌아온 그녀들은 화장을 지운 얼굴로 술상에 둘러 앉아 낮 동안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서로 얘기하기도 했고 한창 연애중인 여자의 얘기에 부러움 반, 질시 반의 자세로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때로 언덕 아래에서 불어온 골바람에 마루 나무문이 덜컹거렸다. 그러는 동안 때로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나는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다.

 술자리는 늘 나지막하게 시작해서 큰소리로 부르는 합창으로 끝났다. 대개 이런 식이었다. 서서히 말이 끊기고 몇몇은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누군가 턴테이블을 켜고 음악을 튼다. 이런저런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러다가 누군가 김광석의 노래를 듣자고 마한다. 다들 좋다고 한다. 그리고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예컨대 이런노래.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 날들' 같은 노래들.

 그러면 다들 처음에는 그 노래를 듣다가, 하나 둘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그러나가는 이내 다들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안다. 내가 왜 김광석의 노래를 그토록 목청껏 부르는지. 하지만 그들ㄹ이 또 왜 그처럼 목청껏 부르는지 알 수 없었다. 나름대로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내 짐작이 정확하게 맞는지 그건 지금도 알 도리가 없다. 어쨋든 술에 취하면 우리는 김광석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내가 기억하는 청춘이란 그런 장면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애매한 계절이고, 창문 너머로는 북악 스카이웨이의 불빛이 보이고 우리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다른 일들을 생각하며, 하지만 함께 김광석의 노래를 합창한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하지만 과연 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내 기억 속 그 정릉집의 모습은 거대한 물음표와 함께 남아 있다. 그건 아마도 청춘의 가장 위대한 물음표이지 싶다.

 

p138






















_

청춘은 그런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가는 그 빛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떠나버렸다.

 

p142




























_

그해 11월, 나는 남몰래 정이 들어 자꾸만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유목민이었다. 염력을 익히는 게 아니라, 일단 대학에 가는게 아니라,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고 싶은 사춘기 였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몰라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스스로도 이해 할 수 없는 머리통을 때렸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G.K. 체스터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것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 열여덟살의 11월에 나는 처음으로 그렇게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깨달았던 것이다. 단순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 때문에 사랑했던 것이며, 사랑하지 못할까봐 안달이 난 것이 었다.

 사실은 지금도 나는 뭔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기만 하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여전히 나는 사춘기. 앞족 게르를 향해 가만- 히 살핀다. 


p191 























_

유득공은 [부용산중에서 옛 생각에 잠겨]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직문 아래서 글 읽던 우리가 늙어가듯 / 가을 들어 연잎도 한 철이 지나누나!' 세월은 스르고 흘러 서리 내린 연잎은 그 푸르렀던 빛을 따라 주름져갈 테다.

 연잎이 주름지고 또 시든다고 하더라도 한때 그 푸르렀던 말들이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도 그처럼 푸르렀던 말이 있었다. 예컨대 "글을 잘 읽었다"라든가,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네가 어떤 시를 쓸지 꼭 보고 싶다" 같은 말들,

 

그런 말들이 있어 삶은 계속되는 듯 하다.

 

p196























_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제 몸으로 어둠을 지나오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가장 깊은 어둠을 겪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p202



















_

하지만 바다는, 그런 바다는 다시 보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처음으로, "바다다"라는 말에 놀라던 그때로. 흘러간다.

세월은, 그렇게, 그렇게.

부드럽게, 따뜻하게.

일본 시인 키타하라 하쿠슈의 [세월은 가네]라는 시를 읽으면 가끔 아무런 후회도 없이, 아쉬움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때 그 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던 세월의 속도다. 그 시절이 결코 아니다.

 

세월은 가네. 붉은 증기선의 뱃전이 지나가듯

곡물창고에 번득이는 석양빛.

검은 고양이의 아름다운 귀울림 소리처럼,

세월은 가네. 어느 결엔가, 부드러운 그늘 드리우며 가네.

세월은 가네. 붉은 증기선의 뱃전이 지나가듯.


다시 한번 그렇게 세월을 보낼 수 있다면, 간절히 손꼽아. 수학여향을 기다릴 수 잇다면 .

 " 어텐션 플리이즈, 바우!" 의 세계를 소망할 수 잇다면, 깜짝 놀라 바다를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도, 나이가 들고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p213 















_

내가 사랑한 시절들,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내 안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것들, 지금 내게서 빠져있는 것들....

이책에 나는 그 일들을 적어 놓앗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일들을 다 말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차마 말하지 못한 일들은 당신이 짐작하기를, 나 역시 짐작했으니까.

이제는 경정산만이 남은 이백에게 마주 보아도 서로가 싫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을, 그리워라는 말에는

지금 내게 당신이 빠져 있다는 뜻이 담겻다는 걸 짐작했으니까.

당신도, 나도,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사람이니까. 호 -야레호 -, 내게는 이제 경정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니까.

호 -야레호-, 당신도, 그 어떤 사람도 결국 그럴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는 , 도넛과 같은 존재니까,

이제 다시는 이런 책을 쓰는 일은 없을 테니까.

 

_ 책머리에 <한 편의 시와 몇 줄의 문장으로 쓴 서문>







--------------------------------------------------------------------------------------------


청춘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던 나에게 답이 아닌 방법을 알려준 책.
문장 하나하나가 나를 감동시켜 진짜 내가 청춘은 청춘이가 보다 했다.
언제까지나 이 글을 읽으며 마음이 뭉클해 지길 감히 바래본다.

사랑한다 이 책. 사랑한다 김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