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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지지 않는다는 말_김연수

by yoni_k 201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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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다는 건 누군가를 이겨야만 가능한 것일까?
혹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말라 배웠던 해탈,포기,양보 등등의 의미일까?

지지 않을거야. = 승리할 것이야! 누군가를 제치고 1등이 될 것이야.

지지 않는 다는 것. 
아무도 이기지 않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며, 그저 내 삶을 살아가는것?


이 책은 지는 것, 이기는 것, 이분법을 잊은지 오래인 듯 하다.
그냥 그저 내 삶을 살아 가는 것. 누구와의 비교가 아닌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나가는것.


심장이 뛰는 한, 시간은 무의미.
뛰는 심장으로 모든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며 느끼고 사랑하며 살아라!


어렵지만 아무튼 김연수 산문집은 참 좋다. 
김연수 포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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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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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좋아하자. 하지만 곧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나올텐데, 그때는 그 더 좋은 것을 좋아하자. 그게 최고의 인생을 사는 법이다. 



세상이란 초등학생들의 기대처럼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나쁜 사람들은 여전히 나쁘고, 강한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힘을 이기적으로 사용하고,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쓴다. 자란다는 건 내일의 세계가 오늘의 세계보다 더 나아진다는 걸 믿는 일일 텐데, 세상이 이 모양이라는 걸 아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라기가 좀 힘들어진다. '이 세상은 좋은것도, 나쁜 것도 아닌 상태로 그냥 존재하는 거야. 존재란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좋다고 말해서도, 나쁘다고 말해서도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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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수만은 일들을 무감각하게 여기는 사람은 순식간에 노인이 될 것이다. 기뻐하고, 슬퍼하라. 울고 웃으라. 행복해하고 괴로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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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내가 이런 소설을 다시 쓸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내게 무척 중요하다. 서른다섯 살에 쓴 소설을 읽노라면 다시는 그런 소설을 쓰지 못할 것 같다. 그러므로 지금 쓰는 소설 역시 미래의 내가 다시 쓸 수 없는 소설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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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아니라 경험에 집중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건 삶을 살아가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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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짧게 빠지는 바람에 좋아했던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를 듣던 시절의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유행가를 나느 좋아한다. 영원과는 거리가 먼, 곧 잊힐 노래라서. 그럼에도 바로 그 이유로 영원히 기억에 남으므로.

유행가의 교훈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좋아하자. 하지만 곧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나올 텐데, 그때는 그 더 좋은 것을 좋아하자. 물론 더 좋은 것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다른 더 좋은 것을 좋아하자. 아무튼 지금 여기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만 좋아하자. 그게 바로 평생 최고의 노래만 듣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최고의 삶이란 지금 여기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을 사는 것이리라. 물론 가장 좋은 삶이라는 건 매 순간 바뀐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으로 제대로 산다면, 옛날에 좋아하던 유행가를 들을 때처럼 특정한 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경험들을 많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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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볼 때 청춘이 아름다운 건 무엇도 바꿔 놓지 않고, 그렇게 우리도 모르게 지나가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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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삶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영원할 수 없을까? 어린시절, 친척들로 집안이 북적대던 명절을 보낸 뒤, 며칠 동안 우울한 마은에 젖어 있던 나 역시 그런 의문을 느끼곤 했었다. 나는 아이를 달랬다.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떤 시간도 영원하지 않으며, 또한 행복한 날이 하루라면 외로운 날도 하루라는, 그런 식으로 이 우주는 공정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그걸 설명할 수 있을까? 나조차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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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매일매일 달라진다. 햇살이 눈부시다가 또 흐리다가, 매서운 추위가 계속되다가 다시 훈풍이 불어오고 어느새 계절이 바뀐다. 아침마다 하늘으 ㄹ올려다본다. 거기 변하지 않는 하늘이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나무와 새 들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희망은 달콤하지만, 영원한 세계를 원하는 자들을 늘 배신했다. 나무와 새 들은 영영 맑은 날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자연적인 사실이 있어서 세찬 바람과 축축한 둥지를 견딜 수 있었으리라. 모든 것은 변화하고, 모든 일은 지나간다는 그 자명한 사실 덕분에, 나무와 새 들은 그 사실로 이뤄진 나날을 그저 겪을 뿐이다. 맑은 날에는 맑은 날을, 흐린 날에는 흐린 날을 겪는다. 우리도 다르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다.

몰아치는 바람 앞에서도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꼿꼿하게 서 있다면, 그건 마음이 병든 나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 순간 달라지는 세계에서는 우리 역시 변할 때 가장 건강하다. 단단할 때가 아니라 여릴 때, 나는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볼 때마다 내가 여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한다. 여리다는 건 과거나 미래의 날씨 속에서 살지 않겠다는 말이다. 나는 매 순간 변하는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날마다 그날의 날씨를 최대한 즐기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고 싶다.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민감할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다. 때로 즐거운 마음으로 조간신문을 펼쳤다가도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물론 마음이 약해졌을 때다. 하지만 그 약한 마음을통해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된다. 마찬가지로 가장 건강한 몸은 금방 지치는 몸이다. 자신은 지치지 안흔ㄴ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약한 것들은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리고, 쉽게 상처받고, 금방 지치는 사람이다. 다행이도 원래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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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나는 서울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외로워졌다.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어떤 사람이 됐을까? 아마도 "너를 안다. 정말 잘 안다. 네가 무슨 속셈으로 그러는지 다 알고 있다. 네가 틀렸다는 것을 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나는 옳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른다. 외로운 밤들을 여러 번 보낸 뒤에야 나는 어떤 사람의 속마음을 안다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는 걸 알게 됐다. 하물며 누군가의 인생이 정의로운지 비겁한지, 성공인지 실패인지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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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게 가 닿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계속되는 말하기' 에 해당하는 단어를 따로 만드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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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이란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경험하는 일리라고 생각한다.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쉴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 정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구나.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몇 명. 혹은 좋아하는 물건들 몇 개. 물론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계가 그렇게 넓을 이유도, 또 할 일이 그렇게 많을 까닭도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잘 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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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오랜된 이야기다.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된 이야기에 더 귀가 솔깃해진다. 그러니까 흘러간 유행가 소리에 온몸과 정신이 마비되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게 아니겠는가. 나를 마비시키는 책 중에 <송사 30수> 라는 게 있다. 말하자면 이즈음 내가 듣는 '가요 박물관'의 송나라 판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이런 노랫말이 담겨 있다. 


소년 시절 슬픈 맛이 어떤 건지 몰라

높다란 누대에 오르길 좋아했지요. 

높다란 누대에 오르고 올라

새 노래 지으려고 억지로 슬픔을 짜냈지요.

지금은 이제 슬픈 맛 다 알기에

말하려다 그만둔다.

말하려다 그만두고

아! 서늘해서 좋은 가을이러라 했지요.


아아, 시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왜 용두산에게 변치 말라고 하겠는가? 용두산은 변함이 없으니까. 용두산이 변함이 없다는 게 왜 시가 되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내게 없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으니까. 슬픈  맛이 무엇인지 이제 다 아니까. 그러니까 말하려다 그만두고, 말하려다 그만두고. '아! 서늘해서 좋은 가을'이라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가을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단품을 구경하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가을 단풍을 바라볼 때, 그들은 모두 한 편씩의 시를 짓고 있는 셈이다. 나와 함께 빨갛게, 또 노랗게 물든 길을 걸어가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옛날 노래, 옜날 이야기, 옛날 시를 듣고 읽을 때마다 무릎을 두들기는 것이다. 서른도 후반에 가까워져서야 그 노래와 이야기와 시에서 작자들이 하지 않았던 말들이 눈에, 귀에 쏙쏙 들어온다. 이제야 나도 이심전심으로 느껴지는 감정이 뭔지 알게 된다. 그러니 가을에는 한껏 감상에 빠져 옛 유행가를 듣고 송사를 읽는 셈이다. 내게도 차마 직접 말하지는 못해서, 말하려다 그만두고, 말하려다 그만두고, 뜬금없이 "가을이란 천고마비의 계절, 서늘해서 좋은것이지"라고 말하게 하는 사연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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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모두 사라지고 난 뒤에도 어김없이 중양절은 다시 찾아오고 국화꽃은 만발할 게다. 그리고 그렇게 중양절이 다시 찾아오고 국화꽃이 만발하면 이 시를 지은 송나라의 여류 시인 이청조처럼, 혹은 이 시를 읽고 난 뒤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또 누군가는 황혼이 진 뒤에 혼자 술을 마실 것이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그것만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오래된 시들은 때로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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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우리가 저마다 홀로 나무에 기대거나, 혹은 호숫가에 서서 별을 바라보는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혼자서 별을 바라본다는 건, 단순히 별을 관찰하는 일과는 다르다. 그건 고독을 인정하는 혹은 자기 안의 어둠을 직시하는 일이다. 밝은 신도시의 밤에는 내가 고독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제 고독은 부자들이나 누릴 수 있는 사치스러운 감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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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게르로 들어가면 완벽한 어둠이, 다시 문을 열고 나오면 당장이라도 밤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닐까는 걱정이 들 정도로 너무 많이 매달린 별들이 있었다. 나는 캠프 사무소 앞 벤치에 누워서 밤새 그 밤하늘을 올려다 봤다. 보고 또 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결엔가 이 우주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됐는데, 그 순간 나는 고독을 경험했다. 고독은 전혀 외롭지 않았다. 고독은 뭐랄까, 나는 영원히 살 수 없는데 이 우주는 영원히 반짝일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의 감정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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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를 끝마치고 나올 때부터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근처 맥줏집에 낮아서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눈은 계속 내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은 다음과 같다. 눈, 해산물, 운하, 맥주, 친구. 이 중에서 두 개만 동그라미를 칠 수 있어도 대단한 행운인데(몇 년 전 훗카이도 오타루에 갔을 때. 나는 다섯 개에다 모두 동그라미를 칠 수 있었다.) 그날은 4개까지 가능했다. 새벽까지 눈에 두번 동그라미를 칠 만큼 많은 눈이 내렸고 서울의 교통은 마비됐다. 결국 나는 홍대 앞에서 폭설에 고립되는 행운을 맞은 것이다. 진짜 인생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게 진짜 인생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뜻하지 않은 폭설이라면 최고의 인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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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내가 꼽는 2009년 하늘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5월 27일 초승달, 8월 15일의 노란 애드벌룬, 9월 10일의 양떼구름. 어디서 그 풍경을 바라봤는지, 또 바라볼 때 내 마음은 어떤 상념 속을 헤매고 다녔는지, 모두 기억난다. 그날 먹었던 음식이라든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옷차림, 혹은 바람의 세기와 방향 같은 것들도 모두 기억난다. 시시각각으로 하늘은 변했다. 바라보면 아름다움은 이내 사라졌다.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나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 이해했다. 아름다움과 시간은 상호보완적이었다. 곧 사라질 것이 아니라면 아름답지 않다. 한편으로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삶이 결국 아름다워질 수밖에 없는 건 결국 우리는 모두 죽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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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내 인생은 조금 전환됐다. 예컨대 최초의 인류에서 지금 막 태어나는 아기까지,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병들어 죽는 일은 단 한순간도 끊임없이 계속 이어져 왔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래서 마흔이 되어 문상을 다니는 일은 나 역시 그 흐름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삶은 어떤 흐름에,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DNA의 전수 과정에 가까웠다. 그건 좋은 일도, 그렇다고 나쁜 일도 아니고 다만 자연적인 일일 뿐이었다. 머리로는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됐지만, 가슴 깊이 이 사실을 받아들인 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아는 사람이 죽는다면 눈물을 흘릴 것이며,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건 너무 부당한 죽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연이라는 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만, 때로 그건 너무 잔인하다. 어떤 일을 두고 누군가 "자연스러운 일이지"라고 말한다면, 그게 잔인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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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작가는 글을 쓴다. 그들은 모두 개별적인 한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쓸 것이다. 여기까지가 마흔이 되기 전에 내가 이해한 예술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그 개별적인 존재의 슬픔이란 그 존재 역시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부터 나는 모든 화가와 작가는 보편적인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나에 대해서 그리고 썼던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거나 읽은 대가들의 작품은 예외 없이 나를,나 자신의 삶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처럼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동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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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바로 그런 게 겨울다운 겨울이다. 지난 한 해 나는 정말 힘든 시기를 거쳐 왔다. 내가 힘들었다면, 그건 당신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힘들기만 했다면, 겨울까지 우린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어려운 일 못지않게 즐거운 일도 많았다. 그 사실은 이 겨울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증명한다. 바람이 매서우면 매서울수록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겨울다운 겨울에 우리는 우리다운 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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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움직여 뛰는 행위에는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달리고 싶어서 달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강요로 억지로 달리는 일이다. 전자를 '다리기'라고, 후자를 '후달리기'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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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결과에 따르면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진다고 한다. 이유는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은 서로 다른 세상에 살기 때문에, 20대가 사는 세상은 아직 탄생한 지 30년도 지나지 않은 세상이다. 지속 시간이 짧으니 삶에는 인과보다는 우연이 더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60대가 사는 세계는 벌써 70년 가까이 지속된 세계다. 시간이 그 정도 지속되면 결과를 통해서 원인을 따져 볼 수 있다. 젊은이들이 사는 세계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폐암에 걸리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늙은이들이 사는 세계에서는 수두룩핟. 그러니 두 세계가 다를 수밖에, 노인들의 행복은 거기서 비롯한다고 한다. 그들은 예측가능한 세계에 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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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칭커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내가 어느새 그 맛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중국 요리와 술은 말할 것도 없고 건배를 청하는 일까지도 좋아하게 됐다. 요령은 간단하다. 그냥 믿어 버리는 거다. 지금은 호시절이고 모두 영웅호걸 절세가인이며 우리는 꽃보다 아름답게 만나게 됐다. 의심하지 말자. 남는 건 그걸 얼마다 더 세게 표현하느냐의 문제뿐이다. 그리하여 나 같은 눌변도 장장 5분에 걸쳐 그날의 만남이 얼마나 역사적인 의미를 지녔는지에 대해 떠들게 됐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얘기.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게 말하고 나면 진짜 그렇게 믿어 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먼저 입과 귀로 취한다. 그다음에는 마음이 취하게 된다. 중국 속담에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사람에 취했다"라는 게 있는데 그 뜻 그대로다. 평범한 술자리도 그렇게 해서 대단한 자리로 바뀌게 된다. 말이 모든 것을 바꾼다. 어쩌면 우리는 이 삶에 '칭커'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심이 왜 여기 있는지 말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요령은 간단하다. 지금은 호시절이고 모두 영웅호걸 절세가인이며 우리는 꽃보다 아름답게 만나게 됐다. 의심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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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 떨어지면 나는 그 주문을 왼다. '이제부터 내게 어떤 일이 생길 텐데, 그 일들은 내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로 놀라지 말자. 마음대로 넘겨짚지 말자. 인간성을 밎다.' 다른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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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존재도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편안해지고 모두 행복해진다. 이 말의 의미를 쉽게 납득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 당장 짐을 꾸려서 낯선 곳으로 떠나면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면, 그건 우리에게 여행할 권리가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다들 자기안에 갇혀 있지 말고 떠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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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시간만 지나면 누구나 늘어나는 나이가 아니라 그가 한 행동들로 그 사람을 구별짓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남들보다 몇 년 더 살았다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는 헤드폰을 끼고 배낭을 맨 채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가던 노인을 본 일이 있었다. 잘 타더라. 리스본에서는 젊은 연인들 옆에 혼자 앉아서 우아하게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백발의 할머니도 봤다. 오래 산 사람과 그보다 덜 산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 살아가되 오래 산 사람들은 덜 산 사람처럼 호기심이 많고, 덜 산 사람은 오래 산 사람처럼 사려 깊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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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기쁨은 이 순간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즉각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를 기다리는 행복과 기쁨이란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겨울에 눈이 내린다면, 그날은 행운의 날이다. 내일의 달리기 따위는 잊어버리고 떨어지는 눈이나 실컷 맞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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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지금 네가 읽고 싶은 책이냐?"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영혼은 깨어 있는 셈이다. "이것이 지금 네가 쓰고 싶은 글이냐?" 이건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인데 좀 생각해 봐야겠다. "이건이 지금 네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냐?" 이건 영혼이 대답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어쨌든 질문만이, 오직 근본적인 질문만이 영혼을 깨울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에게 한계가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영혼이 깃든 대답을 하듯이말이다. 그 반대의 세계는 무제한을 장려하는 사회다. 무한한 소비, 무한한 정보, 무한한 인맥...  무한이란 아마도 죽고 난 뒤의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한한 소비와 정보와 인맥에 둘러싸인 사람이란 아무리 뭐라고 무어도 대답이 없는 사람, 그러니까 지금 죽은 사람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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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고독하게 뭔가를 해내는 일은 멋지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결국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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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인생을 바꾼다는 주장을 펼치는 <스토리>란 책으로 '목적의식 유지'라는 제목 아래 스누피 만화의 한 부분이 일례로 등장한다. 만화에서 샐리는 즐겁게 줄넘기를 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왜 그래?" 친구 라이너스가 묻는다. 샐리는 대답한다. " 난 줄넘기를 하고 있었어... 모든 게 다 괜찮았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갑자기 다 부질없어 보였어." 내 생각에 청춘의 시간이 꼭 그렇게 흘러간다. 열심히 뭔가에 빠진다. 그다음에는 갑자기 다 부질없어 보인다. 왜 20대에는 제대로 산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고, 모든게 갑자기 부질없어 보이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20대에는 결과는 없고 원인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예측한 대로 결과가 나오면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고 생각하고, 그때 제대로 산다고 본다. 우리가 자꾸만 어떤 결과를 원하는 건 그 때문이다. 회사원은 사장을 원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결혼을 원한다. 정말 멋진 사람, 남들이 다 부러워 하는 사람,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자기계발서에 써 놓은 것처럼,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원하지 않고 20대를 보내는 사람도 있을까? 그럼에도 20대가 끝날 무렵에 우리 대부분은 알게 된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 씬 더 지질하며, 자주 남들에게 무시당하며, 돌아보면 사랑하는 사람조차 없다는 사실을,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모든 게 다 괜찮았는데, 왜 갑자기 이런 결과를 얻는 것일까? 그러니 20대 후반이 되면 우리는 모두 샐리처럼 울 수 밖에 없다. 그건 아마도 20대란 씨 뿌리는 시기이지 거두는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청춘이라는 단어에 '봄'의 뜻이 들어가는 건 그 때문이겠지. 20대에 우리가 원할 수 있는 건 결과가 아니라. 원인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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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원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 주기 위해서 온 우주가 움직인다는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자주 우주는 내 소원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것 처럼 보인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소원을 말하는 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결혼이 아니라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해야만 할 것이다. 결혼은 어려울 수 있지만, 아낌없이 사랑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그건 내 쪽에 달린 문제니까. 마찬가지로 마라톤 완주가 아니라 매일 달리기를 원해야만 한다. 마라톤을 완주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매일 달리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다. 할 수 없는 이을 해낼 때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때, 우주는 우리를 돕는다. 설명하기 무척 힘들지만, 경험상 나는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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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다 바뀌었다. 그걸 온몸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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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라는 건 얼마나 무정하고도 야속한 존재인가? 좋은 순간들은 영원히 내 곁에 머물고, 나쁜 순간들은 쏜살같이 나를 스쳐 과거 속으로 사라지면 좋겠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절은 알맞은 속도로 변한다. 계절은 오직 변해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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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힘든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근육통과 지루함을 참아 내는 것은 오직 러너로서의 관용 덕택이다. 그렇지만 달리기는 고급 예술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절망을 좋아하는 척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고통과 슬픔을 참아 내는 것은 오직 인간으로서의 관용 덕택이다. 그렇지만 삶은 고급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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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하면 심장은 빨리 뛰고, 발걸음도 빨리지고. '괜찮아, 별 일 아니야'라고 생각하면 또 모든 게 달라지고, 기계도 그걸 아는데, 다른 사람이 그걸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생각은 결국 내 몸을 통해 다 드러나느 ㄴ것, 그러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구나. 그런데 그 사람은 왜 나를 오해 했을까? 장님인가? 눈 떠도 안 보이나? 이렇게 또 흥분하면 그 목소리가 말한다."속도를 맞추십시오" 그래서 매일 듣다보면, 그건 인생의 조언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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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젖지 않는 방법은, 쓰러지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믿는 것들을 위해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나 자신이 너무나 투명해지는 일이었다. 물방울처럼, 유리처럼 투명해지는 일이었다. 스스로 속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봐 겁내지 않는 상태. 아닌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말하는 상태.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건 대단히 가슴이 떨린다. 왜냐하면 거기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이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했는데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면 정말 안 되는 일이니까. 그제야 나는 용기란 한없이 떨리는 몸에서 나오는 힘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게 바로 세상의 모든 영웅들이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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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얘기다. 경험한다는 것은,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