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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사랑을...생각하다 _ 파트리크 쥐스킨트

by yoni_k 2012. 1. 30.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 때는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그

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시간>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은 사랑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유효해 보인다. 즉 우리가 사랑에 대해 생각을 덜 할 때에는 그것이 확실해 보이는 반면, 막상 사랑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점점 더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바보들은 그들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나 선함, 혹은 성스러운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들 역시 이미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단지 중간에 있는 사람들, 바보와 현자의 중간에 있는 사람들만 그것을 추구하다. 당신이나 나, 여기 교차로에 갇혀 꼼짝도 못하고 초조하게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그런 사람들만이 에로스의 화살에 쉽게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 두가지 사례에 비해 남자 종업원에 대한 노작가의 사랑은 여러 가지 점에서 에로스의 본질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사랑에는 도취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 속에서 성스러움을 보고 있으며, 뭔가 창조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사랑은 불멸성을 추구하고 있고, 또 실제로 작가의 작품을 통해 불멸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사랑에는 뭔가 본질적인 것이 빠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여전히 애매하고 정의 내리기 어렵기는 하지만, 사랑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딱 떠오르는 뭔가가 거기에는 빠져 있는 것이다.  











작가의 완전한 일방성, 그리고 의식적인 포기 때문이다. 포기한다는 것은 사랑의 정반대 행위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사랑을 포기하려는 시도는 포기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그 사랑이 사소한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과는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 사람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좋은 의도로 하는 충고들, 저항할 수 없는 논증들, 분명하고 진실한 언급들이 얼마나 커다란 저항을 불러일으키는지 알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를(혹은 그 남자를)사랑해요!>라는 반응 말이다. 더 나쁜 경우네는 그것을 질투로 인한 적대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서, 똑같은 보복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수년한 지속된 우정과 진정한 관계들이 깨지고 만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한테 그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연인에 대한 사랑 이외에는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있을 수 있는 모든 일들은 그녀에 대한 사랑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길은 텅 비어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몰두하고 있다. 한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재치, 지성, 활기, 호기심. 그리고 신중함은 사라져 버렸다. 성스러운 뭔가를 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죽은 자의 시선처럼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멍청한 표정 하나뿐이다. 

 사랑때문에 이토록 멍청해지는 현상은 결코 성적인 유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길로 빠진 아이들에 대한 부모들의 맹목적인 사랑에도 그것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한 이 모든 언급은 기이하고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랑은 인간이 줄 수 있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자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실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 가장 고귀한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 난제를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도데체 어떻게 우리를 멍청하게 만들고 잠재적으로 야만적으로 만드는 감정을 가장 커다란 행복으로 느끼고 또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사랑이란 결국 일종의 병이 아닌가?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병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끔직한 병.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사랑은 독이 아닐까? 양이 얼마냐에 따라 가장 큰 축복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하는 그런 독 말이다. 도와주소서, 소크라테스여, 도와주소서! 







스탕달은 다음과 같이 썼다. <진정한 사랑은 자주, 쉽게, 또 겁 없이 죽음을 떠올린다. 죽음을 쉽게 비교의 대상으로 삼고, 죽음을 얻으려면 도대체 얼마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계산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보통 다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죽음을 참을 수 없는 사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해방구로 이해하는 것이고, 또 하나의 태도는 신사라면 에로틱한 사랑을 추구할 때 덤으로 죽음이라는 모험을 시도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장소가 적절하면 칼이나 총을 집어 드는 경우 말이다. 


















마치 타나토스와 함께 녹아 버리려는 듯이 에로스가 타나토스를 너무나 격렬하게 끌어안는 순간, 사랑의 가장 고귀한 완성을 죽음 속에서 찾으려는 순간이 바로 그런 거부감이 생기는 때이다.  












오르페우스는 그 점에서 우리와 아주 가깝다. 기뻐 어쩔 줄 모르다가도 금세 변덕을 부리고, 맹목적인 용기는 없으나 어느 정도 문명화 되어 있고, 빈큼없고 현명하나 완전히 치밀하지는 못하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와 닮았다. 또한 오르페우스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이었다. 아니, 바로 그 좌절 때문에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더 완전한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