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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사랑을...생각하다 _ 파트리크 쥐스킨트

by yoni_k 2012. 1. 30.








인상깊었던 해설문.





현실에서는 물론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의 예술을 통해 우리는 날마다 다양한 사람의 모습을 접한다. 하지만 그 다양한 모습이 모두 사랑임을 인정한다고 할 때 그것들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붂을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과연 무엇인가? 막상 사랑의 공통점을 추출해 내려고 하면, 즉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려고 하면, 제사로 인용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막막해지는 게 사실이다. 이런 막막함 때문인지 이미 도처에 사랑의 이야기가 만연해 있어도 새로운 사랑 이야기가 또 끝없이 생겨나고 있다. 사랑에 대한 탐구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묻는다. 사랑이 과연 무엇이냐고,


사랑은 과연 무엇인가?

남녀가 사랑을 느끼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사랑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아니면 사랑은 맹목적인 것인가? 

남녀 사이의 사랑은 영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순간적인 환상에 불과한가?

성과 사랑의 관계는 무엇인가, 사랑은 성관계의 전제 조건인가?

사랑이 없는 성관계는 도덕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 없는가?

남녀의 사랑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너만을 사랑해>라는 말은 아름다운 낭만인가, 배타적 소유욕의 표현일 뿐인가?

사랑은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가?

사랑은 사람들을 현명하게 만드는가, 멍청이로 만드는가?


위에 든 예들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제기되는 질문은 많지만 실제로 명확한 해답은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사랑>에 과연 어떤 구체적인 실체가 존재하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쥐스킨트가 언급하고 있는 세가지 사례 역시 거의 공통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상이한, 사랑에 빠진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한 상이함에도 그들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있을까? 물론 세 쌍의 사례에서 굳이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상대방에 대한 맹목적인 열정, 상대방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인 무관심, 이성의 상실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특성은 일부에서는 오히려 진정한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고 있다. 에리히 프롬은 자아상실로 이어지는 순간적이고 열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소비적인 사랑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는 생산적이고 능동적이며, 또한 자신의 존재감이 동반되어야만  진정한 사랑이라고 본다. 때문에 그에 따르면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자아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이 사랑인가? 사랑에 그와 같은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그러한 높은 기준을 충족하는 것만을 사랑으로 보는 것은 오히려 너무 비인간적인 것이 아닐까?  물론 사랑은 서로를 숭고하고 영원한 불멸성으로 이끌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완벽한 조재인 신이 아니므로 사랑을 함헤도 불구하고, 아니,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속물적이고 맹목적인 모습들을 보여 준다.

 이 점에서 쥐스킨트 역시 에리히 프롬식의 금욕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사랑관보다는 사랑이 세속적이고 맹목적이라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하고 모순 투성이인 사랑을 있는 그 자체로 인정하는 듯이 보인다. 금욕주의적이고 냉소적인 입장에 서게 되면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 욕정, 사랑에 대한 요구는 위선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쥐스킨트는 맹목성, 열정, 이성의 상실까지 포함한 사랑의 다양한 측면들을 있는 그 자체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범주에는 정의 내리기 어려운 다양한 측면들이 포함되어 있게 때문이다. 어쩌면 그 모든 현상들에<사랑>이라는 용어를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고 해서 결코 사랑의 실체까지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사랑이 실재함을 믿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사랑을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무수한 논의는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