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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by yoni_k 2012.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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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2탄.
끌림을 읽었을 때의 그 충격, 새로운 세상으로의 친절한 인도. 
그리고 마음의 위로, 사랑에 대한 깊은 고민들이 가득 담겨. 내 마음을 대변해 주었던 그 시간.
을 다시 만났다 !

















_
"거기 한쪽에 두고 가, 그냥 내가 바라보게..."



어쩌면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말이 생각나는 걸까.
그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걸까.
단지 우리가 며칠 머물던 호텔의 건너편 쪽에 앉아 있을 뿐인데.










_                                                                                                                                                                         사람이 사람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건 사랑이 어디론가 숨어버려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걸 만지고 싶어서일 텐데, 그걸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만지고 싶은 걸 텐데, 갖자는 것도, 삼켜버리는 것도 아닌, 그냥 만지고 싶은 것.










_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지 않는, 잘 말린다고 해서 마르지도 않는 인간의 인간적인 단면인 것이다. 그 단면에 얼굴을 들이밀고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묻지 말아라. 그 단면은 감정의 단면이 아니라 우주의 단면이라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단면은 비상한 세포덩어리이기도 하여서 인간의 범주 바깥에 있다.


사랑은 사람이 하는 일 같지만 세포가 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그 사람이 내뿜는 향기와 공기, 그리고 기운들에 불쑥불쑥 반응하는 것이지 않던가. 사랑은 그래서 일방적인 감정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은가. 


사랑의 그림을 보는 건 공짜지만, 사랑이라는 그림을 가지는 건 그렇지 않다. 사랑을 받았다면 모든 걸 비워야 할 때가 온다. 사랑을 할 때도 마찬가지. 


그래서 우리는, 그들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것일까. 그래서 가슴뛰게 잎을 틔우던 싹들은 가벼운 바람에도 시들고 마는 걸까.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넘쳐 보이지만, 지금 당장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금이 가 보인다. 넘치는 것은 사랑 때문이며 금이 간 것도 사랑 때문일 텐데 그 차이는 적도와 북극만큼 거리다.













_

아, 어떻게 저렇게 고요하고도 벅차게 한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이 집에서 나는 평생 가슴에 지닐 그림 한 장을 완성하고 말았습니다. 아주 귀한 그림을 얻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나이가 여든둘인지, 여든하나인지 잘 모른다고 말하며 웃습니다. 할머니의 나이를 물어서 잘 모른다고 대답했으니 할아버지 당신의 나이를 물었더라도 잘 모른다고 대답했겠지요. 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아무것도 셈하지 않고, 무엇도 바라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 살다보면 사랑도 그렇게 완성될 겁니다.

우리가 살ㅇ을 하면서 이토록 힘이 드는 건, 행복을 바라보다 맨 앞에다 자꾸 사랑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기코우에 한번 가보세요. 거참 사랑, 별거 아니데요, 라는 생각으로, 사랑 그거 참 우아하고도 먼 길이데요, 라는 생각으로 술을 조금은 많이 마시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_

허기를 달래기엔 편의점이 좋다.

시간이 주는, 묘한 느낌을 알기엔 쉬는 날이 좋다.

몰래, 사람들 사는 향내를 맡고 싶으면 시장이 좋다.

사랑하는 사람의 옆모습을 보기엔 극장이 좋다.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에는 파도가 좋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생각할 필요 없이 내가 태어난 곳이 좋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위로 받기엔 바람 부는 날이 좋다.

여행의 폭을 위해서라면

한 장보다는 각각 다르게 그려진 두 장의 지도를 갖는 게 좋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알기 위해선, 높은 곳일수록 좋다.

세상 그 어떤 시간보다도,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이 좋다.

희망이라는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두근거릴수록 좋다.

고꾸라지는 기분을 이기고 싶을 때는 폭죽이 좋다.

사랑하기에는 조금 가난한 것이 낫고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가기 전이 좋다.











_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


11월과 12월 사이를 좋아합니다. 그건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_

문득 행복하냐고 묻고 싶을때가 있다. 

할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기울고 있어서가 아니라

넌 지금 어떤지 궁금할때.


많이 사랑했느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게 누구였는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만큼을 살았는지.

어땠는지 궁금할때.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아서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보다

누구를 사랑해서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이

낫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불가능한 사랑이어서,

하면 안 되는 사랑일수록

그 사랑은 무서운 불꽃으로 연명하게 돼 있지 않은가.


















_

스물여섯 시간 버스를 타고 살바도르엘 가야 한다. 어쩌면 버스는 두어시간 늦게 도착할지도 모른다.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버스는 타보질 못했다. 예감보다 늦는 이별도 없다. 이별은 예감만큼 잔인하게 온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살ㅇ아가는 것도 아닌 중간의 것, 그것이 이별이다. 리우데자네이루에 들른 것은 살바도르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는 이구아수 폭포에 갈 것이고 그러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기적의성당'에 가서 소원을 빌지도 ... 소원을 빌게 되더라도 나 또한 그 한 사람의 이름은 떠올리지 말아야지.















_

당신을 생각하느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느라 미열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느라 조금 웃었습니다.


내가 앓고 있는 것이 당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_

언젠가는 그 길에서



갔던 길을 다시 가고 싶을 때가 있지.

누가 봐도 그 길은 영 아닌데

다시 가보고 싶은 길.


그 길에서 나는 나를 조금 잃었고

그 길에서 헤맸고 추웠는데,

긴 한숨 뒤, 얼마 뒤에 결국 

그 길을 다시 가고 있는 거지. 


아예 길이 아닌 길을 다시 가야 할 때도 있어.

지름길 같아 보이긴 하지만 가시덤불로 빽뺵한 길이었고

오히려 돌고 돌아 가야하는 정반대의 길이었는데

그 길밖엔, 다른 길은 길이 아닌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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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난로는 백 년은 된 듯 보이고 주전자는 오십 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물 끓는 소리. 이 물을 조금 마시고 싶군요. 마음으로만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주인이 와서 내게 물 한 잔을 따라준다.

아, 이순간. 나는 이 순간을 가만히 붙들고만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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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나 스스로를 M사이즈라고 여기는 적이 많다. 옷도, 사람도 실제로는 L이어야 하지만 때로 XL이겠지만 나는 나를 M이라는 상태로 놓아둔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란 존재가 눈에 뜨지 않는 게, 그 상태가 감사하다.

평범이란 말보다 큰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평범한 것처럼 남에게 폐가 되지 않고 들썩이지 않고 점잖으며 순하고 착한 무엇이 또 있을까.



















_

아무런 관심이 없더라도 그냥 그렇게 전화번호를 한두 개쯤 떼어오는 버릇이 생긴 건 파리에서의 그런 일로부터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거나 상상하거나 한번쯤 만나보고 싶거나.... 그리되었다. 나는 이야기에 약하다. 이야기에 무너진다. 그래서 엿보고 엿듣고, 내 여행은 어쩌면 당신의 그런 일들을 받아 적는, 기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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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가지려고 하는 마음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속살의 색깔이다. 안달의 색이며 당신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 상태와 당신 자체를 송두리째 질투하는 또다른 마음의 흥분, 그러니 참 고약하다.


심장으로도 가 닿을 수 없는 것들이 있겠지만, 당신에게 일생 동안, 단 한순간만이라도 붙들리고 싶더라도 당신의 문이, 마음이 열리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

심정의 기복을 담은 색. 그래서 먹고 싶ㅇ거나 몸에 걸치고 싶은 색. 마음에 닿으면 길길이 일어날 것만 같은 색. 칙칙한 바닥에서 일어나라고 부추기는 색.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 없이 느껴지는 날, 가까이 두어야 할 분홍은 그런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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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네가 없는 너의 빈집에 들러 너의 모든 짐짝들을 다 들어냈다고 해도 너는 네가 가져온 새로운 것들을 채우면 될 터이니 큰일이 아닐 것이다. 흙도 비가 내린 후에 더 굳어져 인자한 땅이 되듯 너의 빈집도 네가 없는 사이 더 견고해져 너를 받아들일 것이다. 형편없는 상태의 네 빈집과 잔뜩 헝클어진 채로 돌아온 네가 서로 껴안는 것, 그게 여행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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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말


말 한마디가 오래 남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 귀에는 아무 말도 아니게 들릴 수 있을 텐데 뱅그르 뱅그르 내 마음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말. 한마디 말일 뿐인데 진동이 센 말. 그 말이 나를 뚫고 지나가 내 뒤편의 나무에 가서 꽂힐 것 같은 말이.




*

왜 말은 바람이 되고 물살이 되는가.

모든 것이 사라져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말, 모두 다 빗물에 씻겨도 씻겨 떠내려가지 않을 당신, 그 무렵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를 당신에게 말하지 못했다.





















_

문득, 아니 오래전부터 난 참 사랑을 못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곤 한다. 아무리 목숨을 걸어도 목숨이 걸어지지 않는, 일종의 그런 운명 같다. 이래서 사람이 안 되는 것도 같고 아무도 나를 사랑할 것 같지 않으며 사랑이 와도 바람만큼만 느끼는 것. 그래서 내 사랑은 혼자 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순례의 길과도 같아서 그 길을 통해 자기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속성이 있다. 아니 그 속성만 있다. 그 속성으로 구원받고자 함이 사랑이라면, 사랑한다는 말은 대단한 말이 아니라 구원받겠다는 말이다. 














_

네가 사랑에 빠졌다면 꿈틀꿈틀 가슴 한가운데, 뭔가 알지 못할 물기가 치밀어오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주황색으로 뭉글뭉글 심장 한가운데서 퍼져나가 너를 잠 못 이루게 하거나 너를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도 할것이며 어쩌면 바람을 일으켜 우산을 뒤집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주황은 실제의 색이 아니라 차라리 정신적인 색이다.

주황은 독특한 에너지를 품고 있기도 해 소량의 독을 퍼트린다. 

네가 사랑에 빠졌다면 너의 머리는 온통 이 주황색 물감으로 가득 찰 것이며 그 사랑에 빠진 네가 손을 뻗기만 하면 세상 모든 사물들이 주황으로 물들어버릴 것이다. 사랑이 시작됨과 동시에 방망이처럼 닥치는 색, 그 몸살의 색이다. 그 몸살을 이용해 허풍을 부풀리고, 단단히 과시를 부풀리고 또한 네 감정 모두를 끈적하게 포장하기도 할 테니 조심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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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들기 쉬운 사람.

많은 색깔에 물들었으며 많은 색깔을 버리기도 했다. 내 것인 듯하여 껴안았고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지워 없애거나, 곧 다른 색으로 이사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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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그러질 못했지만, 얼마 전부터 술으 마시고 있는 촉촉한 나의 상태를 즐기게 되었다. 내가 술을 마시는 건 순전히 사람을 좋아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사람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건 술이라는 생각이다. 술은 착하며 솔직하다. 확실히 인간보다는 그렇다. 술만큼 인간적인 물질도, 술만큼 인간을 더 인간적이게 하는 화학도 없다. 혼자서는 마시지 못하는 술 습관을 힘들게 고쳐, 혼자 않아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혼자 술을 마신 상태에서는 다른 색깔에 물들기 쉬운 상태가 된다.그 상태처럼 평화로운 시간도 없다. 인간적이고 싶을 때 술을 찾는 솔직한 상태, 단언컨대 술은 마음에 몸에 색을 밀어올린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혼자 술을 마시는 작업'은 내 색깔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너무 많은 색깔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너무 많은 색깔을 이해하려 했으므로, 고로 나는 시끄러웠으므로 나를 이루고 있는 색들을 쫒아내고보자는 셈인 것이다.


비닐하우스의 비닐 같은, 유리창에 달라붙은 습기나 증기 같은, 일단 내 목표는 당분간 무의미한 색을 띠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심각하지 않은 작업은 곧 재미를 잃을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나다운 색으로 되돌려질것이란 것도 알고는 있다. 다시, 사람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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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좋다. 라는 말은 당신의 색깔이 좋다는 말이며, 당신의 색깔로 옮아가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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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카페가 좋아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카페 기둥에 흰색 페인트를, 화장실 문에 흰색 페인트를 칠해놓은 게 마음에 들었던 거다. 사실 그 색이 좋아 카페의 분위기가 좋고 심지어 커피맛도, 주인장의 얼굴까지도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아주 사소한 부분들을 쌓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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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기억이 아닌데도 한 사람의 기억으로 웃음이 날 때가 있다. 돌아보면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닌데도 배를 잡고 뒹굴면서까지 웃게 되는 적이. 하지만 우리를 붙드는 건 그 웃음의 근원과 크기가 아니라, 그 세세한 기억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차곡차곡 남아 주변을 깊이 채우고 있는 그 평화롭고 화사한 기운이다. 인연의 성분은 그토록 구체적이지도 선명하지도 않은 것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좋아지면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저녁이 되면 어렵고, 밤이 되면 저리고, 그렇게 한 계절을 한 사람을 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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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의 것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내가 누구의 것이 되어 이리도 어렵게 몸과 마음을 사용하면서 사는지 가끔은 그 주인이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날을 잡아 열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도착해 그곳에 뭔가를 묻어두고 다시 돌아옵니다.

묻어두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내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내가 갖지 못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묻고 묻어 작은 동산을 이루면 나는그것들을 묻었다 하지 않고 가졌다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르게 뭔가를 묻어두는 일은 모두 결핍에서 옵니다. 묻어둔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숨겨두는 일이지요.


그래서 하루에 한 번쯤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화분에 물을 주면서 식물의 키를 살펴보는 일, 창문밖 까치집을 올려다보며 안부를 붇는 일, 뜨거운 흰쌀밥에 마치 동물처럼 코를 묻고 킁킁대는 일. 그 모두가 나의 결핍을 어루만져주리라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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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안다고 뭐 그리 대수겠는가.

많이 아는 체하는 날들은 고개 숙이지 못하게 한다. 고개를 숙이지 못하면 남보다 먼지를 더 들이마시게 되고 그 먼지는 씻겨나가지 못하고 몸안에서 굳어지고 딱딱해져서 생각과 함께 돌이 된다.


조금은 바보 같기도 한다. 눈을 감고 잠시만이라도 모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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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모든 것을 털어놓아도 좋은 한 사람쯤 있어야 한다. 그 한 사람을 정하고 살아야 한다. 그 사람은 살면서 만나지기도 한다. 믿을 수 없지만 그렇게 된다. 

삶은 일방통행이어선 안된다. 루벤 곤잘레스처럼 우리는 세상을 떠날 때만 일방통이어야 한다. 살아온 분량이 어느 정도 차오르면 그걸 탈탈 털어서 누군가에게 보여야 한다. 듣건 듣지 못하건 무슨 말인지 알아듣건 알아듣지 못하건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다 털어놓을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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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은 한 사람의 등짝인지도 모릅니다. 

좋은 친구,아름다운 사람, 닮고 싶은 어떤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등.



그걸 바라보고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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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한테 내가 어떤 사람이었으면 하는가요?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그러네요.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의 '상태'를 자꾸자꾸 신경쓰게 되는 것.


문득 갑자기 찾아오는 거드라구요. 가슴에 쿵 하고 돌 하나를 얹은 기분.

절대로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그렇게 되는 거예요.



누군가가 마은에 들어와 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날씨처럼, 문득 기분이 달라지는 것. 갑자기 눈가가 뿌예지는 것.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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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쉬어갈 곳이 필요합니다. 어느 한 시간, 푹 젖어 있는 마음을 말리거나 세상의 어지러운 속도를 잠시 꼭 잡아매두기 위해서는 그래야 합니다. 하루를 정리하는 어느 시간의 모퉁이에서 잠시만이라도 앉아 있을 수 있다면 그곳은 천국이겟지요. 천국 별거 있나요.

들뜬 기분들을 차분히 누를 수 있다면, 얹힌 기분들을 잠시 정리할 수 잇다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 무조건 잠시 앉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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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은 백 년이 지나도 자신들만의 속도와 온도를 유지하면서 살 것만 같은데, 내가 여행에서 돌아가 만나야 할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어나줄런지요.

잠시 스친 느림보 마을, 그곳에서 내려 잠시 머물다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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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에서 서른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달려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아 버스 안에서 죽겠구나 싶었지만 대여섯 시간을 잠으로 흘려보낸 뒤 문득 올려다본 파란 밤하늘 덕분에 일순간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빈 옆자리의 의자도 내가 앉은 의자처럼 뒤로 눕힌 다음 몸을 비스듬히 눕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의 별을 세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 하늘의 푸르름을 싫증날 정도로 노려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 이마가 시큰해질 정도의 슬픔이 찾아왔다. 아름다움은 슬픔을 부른다. 유난히 눈부신 아름다움은 밤에 더 빛난다.

나는 무엇 때문에 가고 있는가.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가. 복잡한 여러 생각으로 더 울컥해지는데 뒷자리에서 낮고 두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처럼 멋진 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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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여전히 인간적인 것들은 아름다운 것이고 그것만이 세상을 이끌어갈 거라고, 나는 그 밤을 내 몸에 새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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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겠다고 하는 순간부터 멀어져도, 헤어져도, 보이지 않아도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질 않은가. 사랑이어서 일어난 그 많은 일들을 단번에 지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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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데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기에 사랑은 얼마나 보이지 않으며 얼마나 만질 수 없으며 또 얼마나 지나치는가.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지나치는 한 사랑은 없다. 당장 오지 않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는 이치다. 당장 없는 것은 영원히 없을 수도 있으므로,

그렇더라도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는 말라. 사랑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불안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믿으려는 것이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걸 못 견뎌하는 것이다. 사랑이 변해다,고 믿는 건 익숙함조차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있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도 없는 것이며 나도 이 세상에 오지 않은 것이며 결국 살고 있는 것도 아니질 않은가.

그렇다고 사랑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사랑은 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 사랑할 때의 행복을 밖으로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상태가 사람을 키운다. 애써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넘치는 상태만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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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사랑을 하자. 사랑을 하더라도 옆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하자. 옆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하는 일. 그것은 사랑의 끝이다.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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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삶도 전부도 아니다. 사랑은 여행이다.

사랑은 여행일 때만 삶에서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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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번 쯤 


처음 영화관에 가본 것처럼 어두워져라.

곯아버린 연필심처럼 하루 한 번쯤 가벼워라.

하루 한 번쯤, 보냈다는데 오지 않은 그 사람의 편지처럼 울어라.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당신밖에는없을 것처럼 좋아해라.


누구도 이기지 마라, 누구도 넘어뜨리지 마라.

하루 한 번 문신을 지워낼 듯이 힘을 들여 안 좋은 일을 지워라.

양팔이 넘칠 것처럼 하루 한 번 다 가져라, 세상 모두 내 것인 양 행동하라.


하루 한 번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앉으라, 내가 못하는 것들을 펼쳐 놓아라.

먼지가 되어 바닥에 있어보라.

하루에 한 번 겨울 텐트에서 두 손으로 감싼 국물처럼 따듯하라.


어머니가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만큼 애틋하라.

하루 한 번 내 자신이 귀하다고 느껴라.

좋은 것을 바라지 말고 원하는 것을 바라라.

옆에 없는 것처럼 그 한 사람을 크게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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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다시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다행이다. 여행은 직진하는 것도 아니고, 백 미터 달리기처럼 백 미터를 다 왔다고 멈춰 서는 것도 아니라서 다음을 기약할 수도 있으니 다행이다.

그때까지 내게 아무도,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괜찮다. 오래 그리워했던 것을 찾아 나서기에는 언제나처럼 혼자여도 좋겠다. 다만 겨울이면 좋겠다. 

눈이 많이 내려 그곳에 갇혀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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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로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정도로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나의 퇴락은 어쩔 수 없겠으나 세상에 대한 갈증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보는 것에 대한 허기와, 느끼는 것에 대한 가는으로 늘 내 자신을 볶아칠 것만 같습니다. 이 오만을 허락해주십시오.

아, 그러고보니 그리스인 조르바는 마침 내가 배에서 지내며 세 번인가를 읽었던 그 소설이기도 하네요. 그 시절, 세 번을 읽었던 이 한권의 소설 말고 나는 과연 누구를 사랑하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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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제인가.

해는 지고 있고 하늘이 시리게 시리게 파란데, 

저녁으로 맥주 한 잔과 키예프식 호박전을 앞에 두고 있는데, 

당신이 내 마음속에 있는데, 



황금으로 지은 집을 가진들 무슨 소용이랴. 

샹트페테르부르크의 가을이 가슴 미어지게 눈부신들 어찌하랴. 

당신이 당신이 없는데,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바보 같은 사람.

여러 번 당신에게 말했지만 나는 멀리 있는 사람.

그러나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한 가지.

당신에게 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불가능한 사람.
















_

내가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하면 세상은 끝나는 거라고, 비록 세상에 단 한 사람일지라도 죽도록 미워해버리면 세상은 그냥 그렇게 고장나버리는 거라고 믿기로 했던 겁니다, 그곳에서. 그리고 사랑하고 싶었던 겁니다. 누군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