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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_ 전경린

by yoni_k 2012. 1. 30.

한가로울 때, 오랜만에 맑은 머리와 바른 자세로 잠깐 삶을 쉬게 될 때, 누구나 그렇듯이 삶이 꿈속 같고 나 자신이 존재라기보다는 본질인 것처럼 무화되는 것을 느낀다 . 울음을 그치고 허무로 돌아가듯이... 스무 살이든, 마흔 살이든, 일흔 살이든 그것은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지점인 것 같다. 떨림과 어긋남과 차이... 그속에서 우리의 생은 LP판 속의 가수처럼 노래한다. 







 
'탈이란 어떤 경우든 은폐와 신비화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야 상징과 표현이라는 두 개의 요소로 환원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살짝 바꾸어 외우고 있었다. 얼굴이란 어떤 경우든 은폐와 신비화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야 상징과 표현이라는 두개의  요소로 환원된다. 스무 살인 나의 얼굴을 날마다 껍질이 벗겨지는, 아직 역할을 얻지 못한 쓸쓸하고 적막한 탈이었다. 











 
"사소하니까. 지금 나의 생이란 어차피 너무 사소한걸. 이걸 하든, 저걸 하든, 뭔가를 하든, 아무것도 하지 않든 차이가 없어."









'방학은 제게 중요해요. 나도 중요한 일이 있다구요.'

하지만 무엇이 중요한 일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냥 수무 살이라고 대답할 수 밖엔 없겠지. 하지만 스무 살이 어쨌다는 건가.. 누가 스무 살을 그 자체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자신조차 모르는 무정형의 존재를.. 나는 대화를 단념했다. 








자라서 소도시의 전화국이나, 우체국, 동사무소 같은 데서 일하게 되는 인간들은 어떤 꿈을 꾼 것일까.. 나는 그들을 볼 때 오직 그런 의문만이 들었다.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있는 인생을 살겠다고 꿈을 꾸었는지 모른다. 예기치 않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생. 그들의 몸에서 소리가 들렸다. 두 눈과 손과 숨소리에서도...

 '우린 어디로도 갈 수 없어. 먼 곳으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오해야. 소문에 불과하다고. 이 세상에 새로운 삶이란 없어. 어디서나, 한 걸음 한 걸음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사는 거야. 성실, 인내, 정직, 소박... 헛바람이 드는 건 성질 더러운 것보다 더 나빠.'

 그들은 소도시의 표상들처럼 존재했다. 그것이 내가 그들을 미워하는 이유였다. 







삶은 기다림이다. 당장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아직 남겨지 시간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없이 무심한 편이었다. 스무 살이란 아직 시간 이전에 붙박여 있는 나이였다. 손오공이 얼굴만 내놓고 바위벽에 갇혀 있듯이. 삶이란 좀 처럼 시작되지 않는다.  







김해경의 편편한 가슴은 안으로 약간 휘어져 허약하고 젊게 느껴졌다. 난 비어 있어, 텅 비어 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비낀 채 열어젖혀둔 방문 바깥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나는 불편해져서 웃었다. 누군가 나에 대해서 자기 식대로 규정하면 나는 포획된 이미지처럼 꼼짝없이 그런 사람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나의 내면을 설명할 도리도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나..  나를 알려고 하면 할수록 나란 존재의 경계는 열려버리고 자신이라고 믿는 것이 점점 더 허구가 되어버린다. 단지 '너'가 아니기 때문에 '나'인 것만 같은, 세계와 타인 사이의 경계막, 살려고 하는 또하나의 맹목적 의지, 질서를 부여해야하는, 두서없이 뒤섞인 욕망의 덩어리, 혼자 있을 곳을 찾아헤매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비극적인 이중 도주.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래서 어쨌다는 건지 결론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우리의 의식과 감각을 초원하는 문제니까. 살려고 하는 의지 때문에, 다른 살려고 하는 의지를 방해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각성이 뒤따르는 정도이다. 

 그러니 나에 대해 스스로도 규정할 수 없다. 차라리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혈액형이나 별자리, 혹은 어린 시절의 사소한 도벽과 잠에 관한 도취,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모딜리아니 그림 속 여자인 잔 에뷔테른과 닮았다고 한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라니?"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그냥 초조해."

상경과 영신이 그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다들 초조해서 무언가를 하지. 심심해서인가, 심심함이 불편해서인가, 아니면 초조는 심심함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상태인가..."

"심심한 것과 초조한 건 달라. 초조한 건 말이야. 막연한 무위가 아니고 뭔가 해내야 할 일에 대한 강박증이거든. 어쩌면 미경험 처녀이기 때문이 아닐까. 초조한건."










수련아. 지구상의 사람들 육십오 퍼센트가 환생을 믿는단다. 누가 그러는데, 살아생전 자기가 가장 사랑했더 ㄴ사람의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는구나. 그러니까, 지금의 얼굴은 전생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인 거야. "


....


" 피, 거짓말....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면요?"

"그러면 다시는 안 태어나지."













오전에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대출하거나 신문을 넘겨보고, 조금 일찍 시내에 나가 영화를 한 편 볼 때도 있었다. 공연히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거리를 걷거나, 어두운 차집에서 일기장을 써넣거나 버스를 타고 멀리 유원지까지 가서 오렌지색 시럽이 잔뜩 든 팥빙수와 핫도그를 먹고 걸어서 돌아오기도 했다. 어쩌면 그즈음 내가 가장 좋아한 건 길이었다. 유원지의 맑고 한적한 길과 대형 트럭과 버스들이 달리는, 플라타너스 가로수의 잎사귀가 공해에 검게 찌든 간선도로들, 좁고 긴 시장길들, 오르막길 도시 언덕길, 길고 좁다란 골목길들, 변두리 어촌에 바다로 가는 쇠똥이 퍼져 있는 뙤약볕 아래의 누런 흙길.............

세상에서 가장 관대한 것은 길이었다. 그것은 공기와 같이 지불을 청구하지 않았다. 길은 강처럼 이것과 저것 사이에 나 있었고, 나는 가끔 길과 강을 혼동해 도심의 거리 한가운데서도 소용돌이치는 물결에 떠내려가는 사람처럼 허우적 거렸다. 












"넌 나쁜 꿈을 꾸고 있어. 세계는 언제든 나와 너 자신과 함께 바로 이곳에서 새로워질 수 있어. 그걸 위해 우린 싸우는 거지. 그건 새로운 세대의 강박증이지만 청춘의 정의이고 세계에 대한 청춘의 예절이기도 해."

 말은 청춘 선언처럼 확고했지만 성재의 눈은, 하지만 이건 이론일 뿐이야, 라는 듯 연약하게 흔들렸다. 













'얼마나 먼길을 헤매야 소년들은 어른이 되나- 얼마나 먼 바다를 건너야 갈매기는 쉴 수 있나 - 얼마나 긴 세월을 흘러야 사람들은 자유를 얻나 - 친구야 묻지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 '

스무살이란 뭔래 막막하라고 있는 나이 같았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있는 나이... 어른들은 습관과 의무 속에서 살고 아이들은 충동과 잔소리 속에서 살며 나는 몽상과 도주의 욕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았다. 











"넌 뭐가 되고 싶니?

"몰라. 하지만 뭔가 특별한 것이 되고 싶어..."

"넌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구나."

"아니야. 대단한 게 되려는 건 아니고 나를 발견하고 싶은 거지. 내 속의 나를 꺼내고 싶은 거야. "

"난 이상해. 내 의지와 달리 본성 속엔 오히려 묻히고 싶어하는 의지가 있거든. "

"숨어서 사는 사람?"

"모르지. 산 속에서 버섯 키우거나, 바닷가에서 찻집을 하는 수도 있지. 높은 산에서 산장을 할 수 있고."

"아무것도 되지 않으면 되는 일이네."
"그렇지."


나는 그런 남자와 함께 사는 모습을 잠시 상상했다. 가난하고 단순하고 로맨틱 할 것 같았다. 가난한 집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나는 날마다  빨래를 긴 줄 가득 널 것이다. 환한 햇빛 속에서 풀 먹인 빨래는들 빵냄새를 풍기며 바삭바삭 바르겠지.....
















"넌 뭐가 되고 싶니?"

그녀는 거리의 좌판에서 도금 목걸이를 고를 때처럼 가볍게 물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은 언제나 나를 난처하게 했다. 

"모르겠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 다만 그곳으로 조금씩 나를 밀면서 가고 있는 기분..... 잘못 갈지도 모르고 못 만날지도 모르지... 정말 그리울 뿐, 무엇인지 모르겠어.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다만 사는 것 외에는 무엇도 하지 못할 수 있겠지.'













"봐. 죽음이란 이런 걸 거야."

김해경이 나의 팔을 당겨 몸을 돌려세웟다. 눈을 터서보니 여전히 나무 둥치를 꽉 붙들고 있는 턴 빈 허물들은 모두 열다섯 마리쯤 되어 보였다. "

"죽음도 단지 이곳에서 빠져나갈 뿐인지도 모르지. 어딘가 드른 곳에서 도 저렇게 맹렬히 우는지도"

"한때의 형식이. 그 정밀한 실존의 틀이 이렇게도 공허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가져온 공포겠지. 헛것이 아직도 아득바득 나무 둥치를 붙잡고 있으니..."











방 찾기를 포기하자 아무 계획도 없었다. 남은 것은 시간뿐이었다. 그 시절, 언제나 나를 괴롭힌 것은 무한한 양의 시간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밤에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은 때도 시간의 무한함 속에서 의지 없이 표류하는 느낌은 한결같았다.  













"나도 아이를 둘쯤 낳고 분유와 기저귀를 사들이고 동네 빵가게에 빵을 사러 가고, 남편의 생일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러 시댁에 가서 전을 부치는 그런 삶을 살게 될까.... 때론 그전에 너무 멀리 가버릴까봐 두려워. 서른 살이 되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있잖아. 나도 가끔 그 부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해." 
너무 멀리 가도, 얼마 가지 못해도, 서른 살이란 어차피 난처한 나이일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은 영신과 상경과 나, 모두들 가지고 있는 스무 살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아니면 서른살이란 소녀들로선 상상력의 종말인지도 모른다. 서른 살에 대해선 상상의 질료가 아직 없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요 위에 새겨진 단풍잎 모양의 얌전한 얼룩이 보였다. 첫경험은 형편없었어. 하긴, 남자에게 첫경험이무의한 것처럼 실제로 여자에게도 첫경험이라고 굳이 간직할 만한 건 없어. 그건 첫경험이 여자의 생을 지배하는 운명이 되어버렸던 지나간 시대의 말이라구. 짜증을 담은 영신의 말이 떠올랐다.
‘그건 소통이었어. 이 단절된 세계의 틈에 머리를 들이민 밀통이었다구.’ 












어둠 속에서도 요 위에 새겨진 단풍잎 모양의 얌전한 얼룩이 보였다. 첫경험은 형편없었어. 하긴, 남자에게 첫경험이무의한 것처럼 실제로 여자에게도 첫경험이라고 굳이 간직할 만한 건 없어. 그건 첫경험이 여자의 생을 지배하는 운명이 되어버렸던 지나간 시대의 말이라구. 짜증을 담은 영신의 말이 떠올랐다.
‘그건 소통이었어. 이 단절된 세계의 틈에 머리를 들이민 밀통이었다구.’ 










"스무살이 인생이 되게 하지는 말아라. 스무 살은 스무살일 뿐이야. 삶으로 끌고 가지는 마." 









.... 그날밤 너는 나를 놓아버렸니? 그래서 내가, 네가 당겼던 그 힘만큼 무섭도록 빠르게 검은 우주 한가운데로 밀려난 거니? 이곳엔 별이 빛나지 않아. 얼음과 먼지 뭉치인 검은 별들, 빙산 같은 결빙의 별들을 난 지나고 있어... 네가 가 있는 곳은 어떠니? 우린 다시는 서로 소식을 전할 수 없게 되겠지. 이상해. 무엇보다도 너의 제비초리가 선명하게 기억나니 말이야. 너에 대한 기호처럼. 언젠가 그런 제비초리를 가진 애를 만나면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겠지. 안녕. 작별의 말은 참 짧은 거구나. 안녕. 
 








"스무 살이 인생이 되게 하지는 말아라. 스무 살은 스무 살일 뿐이야. 삶으로 끌고 가지는 마."
그것은 좋은 충고였다. 하지만 그때는 충고를 받아들이는 나이가 아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은 어느 자리에 박은 표석이나 어느 공중에 휘날리는 깃발처럼 단단한 목표나 구체적인 꿈이 아니라, 몇개의 단어와 단어들이 거느린 흐릿한 이미지들, 단어들 사이의 그리움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