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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사는 기쁨 _ 황동규

by yoni_k 2013. 6. 27.

 












 

1

오디오 둘러메고 한강 남북으로 이사 다니며

개나 고양이 가까이 두지 않고

70대 중반까지 과히 외롭지 않게 살았으니

그간 소홀했던 옛 음악이나 몰아 들으며

결리는 허리엔 파스 붙이고

수박씨처럼 붉은 외로움 속에 박혀 살자,

라고 마음먹고

남은 삶을 달랠 수 있을까?

  

2

사는 건물을 바꾸지 않고는 바꿀 수 없는 바램이 있다.

40년 가까이 아파트만 몇 차례 옮겨 다니며

‘나의 집’으로 가는 징검다리거니 생각했다.

 

마지막 디딤돌에서 발을 떼면

마련한 집의 담을 헐고

마당 절반엔 꽃을 심자.

야생화 밟지 마라 표지 세워논 현충원 산책길엔 도통 없는

노루귀 돌단풍 은방울꽃

그래, 몰운대(沒雲臺)에서 크게 눈 뜨고 만난 은방울꽃

카잔차키스 묘소에 열심히 살고 있던 부겐벨리아

루비보다 더 예쁜 루비들을 키우는 노박덩굴을 심자.

겨자씨 비유의 어머니 겨자도 찾아 심자.

나머지 반은 심지 않아도 제물에 이사 와 자리 잡는 풀과

민박 왔다 눌러앉는 이름 모를 꽃들에게 내주자.

개미와 메뚜기 그리고 호기심 많은 새들이 들르고

벌레들도 섞여 살겠지.

 

그래, 느낌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마당이 있고

귀 힘 아주 빠지기 전 오디오 볼륨 제대로 울려줄 집이 주어진다면!

오크통에 30년, 책장 구석에 30년, 세상 잊고 산 위스키 앞세워

와인과 막걸리와 칵테일을 모아 놓고 친구들을 불러

먼저 가버린 자들도 번호 살아 있으면 문자를 보내

파티를 열자. 바램은 아직 유효하다.

 

3

유효할까?

파티 다음 날, 종일 속도 마하0으로 움직이는 텅 빈 맛이

몸에 버틸 힘을 줄까?

 

가을 들어 처음으로 은행잎이 비행연습을 시작하는 저녁

동향한 창밖으로

건너편 언덕 아파트의 모든 창들이 일제히 황금향으로 피어난다.

대가(代價) 없이 자신을 태우는 황금의 절창들!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는

한 해 가운데 이 한때가 가장 마음에 든다.

‘가장’이라는 말에는 지금까지라는 뜻이 숨어 있고

다음은 텅 빔?

조금 전 건물 입구에서

시들고 있는 꽃에게 안부를 물었다.

코끝에 채 맴돌기도 전에 사라지는 향기로

꽃은 답했다. 텅 빔?

텅 빔이 가짐보다 바람의 근본일까… 아닐까?

햇빛 스러지며 한 자락씩 황금에서 어둠으로 바뀌는 창들이

차례로 물음을 던진다.

 

4

그간 군(郡)에서 주차장 집어넣고

매점과 화장실 내고 길 펴고 넓혀

오르내리는 맛을 한껏 줄인 몰운대,

발걸음 멈추게 하던 제비꽃 달개비들 사라지고

숨었다 들키던 은방울꽃 자취 감추고

미끄러워 마음 잡아주던 바윗길은 보이지 않고,

올라보면, 시야 가득 차오는 비닐하우스들

뜬구름조차 뜨지 않고…

아 몰운대에서 풀려난 몰운대!

그 언저리에 집 한 칸 마련해

강원도에서 차를 몰다 덜 살고 싶을 때면 슬그머니 들러

낮에는 대에 올라 다른 아무 데도 눈 주지 않고

밤에는 모깃불 피워놓고 모기 침 쿡쿡 맞으며

답답함에서 풀려나리라던 긴 긴 꿈에서

이젠 새삼 놓여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는가?

영영 놓여나지 못하게 되었는가?

  

5

바위틈에 발톱을 박고 서있는 나무 다섯 그루

바로 뒤에 야트막한 초막

비어 있다.

그 뒤로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말없이 넓게 펼쳐진 물

물 건너 그림자 하나 없이 커다랗고 깨끗한 산.

원나라 화가 예찬(倪瓚)의 한없이 맑고 적적한 산수는

은둔 신호만 켜지면 모든 것 놔두고 들어가

신선인 듯 가볍게 거닐고 싶었던 곳,

오늘 그의 그림 다시 들여다보니

사람들도 짐승들도 그냥 들여다보기만 했을 뿐

멧새 하나 날지 않는다.

들어오려면 그림자도 놔두고 오라?

 

읽던 책 그대로 두고 휴대폰은 둔 데 잊어버리고

백주(白酒) 한 병 차고 들어가

물가에 뵈지 않게 숨겨논 배를 풀어 천천히 노를 저을까?

건너편을 겨냥했으나 산이 통째로 너무도 크고 맑아

무심결에 조금 더 무심해져

느낌과 꿈을 부려놓고 그냥 떠돌까?

 

바람이 인다. 갑자기 구름떼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여기저기 물기둥들이 솟아 상체를 흔들고

얼음처럼 투명한 해가 불타며 하늘 가운데로 굴러 나온다.

바위에 발톱 박은 나무들이 불길처럼 너울대자

부리 날카론 새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몰려든다.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예찬이여, 아픔과 그리움을 부려놓는 게 신선의 길이라면

그 길에 한참 못 미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간간이 들리는 곳에서 더듬는다.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