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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교수를 떠올리면 그의 집을 향해 출발을 해도 결국은 도착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마음속에 그늘처럼 번졌다.
그날 낯선 것에 찔린 것 같은 그 통증이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도 남아 있을 줄을.
지. 금. 뭘.하.고.있.는.거.야?
스무 살 때 마음속에서 지. 금. 뭘.하.고.있.는.거.야? 라는 질문이 솟아나면 나는 학교를 나와 공기속에 썪여 있는 매운 가스에 눈물을 흘리며 끝도 없이 이 도시를 걸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이 변한 게 없는 것인가. 나는 지금도 그 눈을 생각하면 집 바깥으로 나가 어떤 길이든 그 길 끝까지 걸어다닌다. 나도 사회 풍경도 나아진게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더 불완전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을 잇는 대고가 무너져 등교하는 여학생들을 태우러 가던 버스가 강물로 투신하듯 빠져버렸을 때도, 어느 날 아침 월스트리트 높은 건물 속으로 비행기가 파고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도, 새해 첫날에 믿기지 않게 붉은 불길에 휩싸여 있는 숭례문을 텔레비젼 앞에 앉아 열몇 시간 지켜봐야 했을 때도, 지. 금. 뭘.하.고.있.는.거.야? 예전과 똑같은 질문이 떠오르곤 했다. 깊은 밤중에 자동차 키를 들고 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숭례문 주위를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때까지 빙빙 돌아보았다. 무릎을 꿇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이 도시를 걸어다니는 건 그때나 지끔이나 마찬가지다. 그 우울과 고독속에서 자수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와 함께였으면 좋겠다고.
우리가 그 바닷가로 간 것은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뱃전에 서서 바닷바람을 쐬는 동안엔 나를 지치게 하던 그 무슨일인가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그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없이 해변을 걷고 또 걷다가 바닷물에 밀려와 있는 죽은 갈매기를 발견했다.
-새여!
내가 젖은 모래 위에 떠밀려온 죽은 새를 보며 웅얼거리자 그가 모래 구덩이를 깊이 파고 새를 거기에 묻었다.
-무슨 소용이야. 바닷물이 또 쓸어가버릴걸.
-그래도!
그래도! 라고 햇던 그의 말이 떠오르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는 한때 내게 언제나 그래도! 라는 말을 연상케 하는 존재였다.어떤 상황에서도 그래도 그게 낫잖아! 라고 말했던 그런. 그는 가방에서 노트를 한 장 찢어 다시 부활하라, 새여, 라고 써서 나무막대에 돌돌 말아 새의 무덤 앞에 꽂아두었다. 우리는 그날 저녁을 먹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뭘 먹었던 기억도 배가 고팠던 기억도 없다. 바다 끝이 어디인지 알아보겠다는 듯 우리는 모래 속으로 발을 빠뜨리며 섬에 어둠이 밀려올 때까지 오래오래 걸었다.
-정----윤!
얼마쯤 지나 그가 나를 불렀다. 그가 나를 성까지 합해 정윤이라고 부를 때는 생각할 게 많다는 뜻이었다.
-응?
-우리 오늘을 영원히 기억하자.
검은 바닷물이 또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오늘을 잊지 말자.
겨우 잊지 말자구? 나는 싱거워서 잊지 않으려면 징표가 있어야해, 라고 혼잣말하듯 말했다.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더니 그가 가방 속에서 노트를 꺼내 내속에 쥐여주었다.
-내가 갈색노트라고 이름 지은거야. 생각날 때마다 내가 끄적거린 것들. 니가 갖고 있어줘.
그가 내 손목을 감싸 잡아당겼고, 나는 얼결에 그의 가슴에 안겼다. 그가 내 손을 자신의 바지 가운데 부분으로 가져다대며 말했다. 이것도 줄 수 있는데.
살아보지 않은 앞날을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앞날은 밀려오고 우리는 기억을 품고 새로운 시간 속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기억이란 제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속성까지 있다. 기억들이 불러일으킨 이미지가 우리 삶 속에 섞여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기억이나 나의 기억을 실제 있었던 일로 기필코 믿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고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면 나는 그 사람의 희망이 뒤섞여 있는 발언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그렇게 불완전한 게 기억이라 할지라도 어떤 기억 앞에서는 가만히 얼굴을 쓸어내리게 된다. 그 무엇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던 의식들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기억일수록. 아침마다 눈을 뜨는 일이 왜 그렇게 힘겨웠는지,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은 왜 그리 또 두려웠는지, 그런데도 어떻게 그 벽들을 뚫고 우리가 만날 수 있었는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나 죽음의 의미를 알게 되는 일이 나이먹는 일과 비례하는 건 아니다. 세월이 쌓인다고 알게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내게는 오히려 청춘 시절보다 지금이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에 더 서툴고, 느닷없이 찾아드는 죽음의 소식에 매번 당황하며 휘둘리니까.
책을 다시 읽을 것.
책을 읽을 때마다 발견한 새로운 단어와 그 뜻을 노트에 적어 개인사전을 만들 것.
일주일에 시 한편씩을 외울 것.
추석 때까지는 엄마 묘소에 가지 말 것.
이 도시를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걸을 것.
변하지 않은 것들은 오래전의 그 순간과 지금의 이 순간을 한순간에 섞어버린다.
나를 사랑하니? 라는 질문은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대답을 들어도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을 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랭보는 말했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일은 값싼 술을 마시고 취한 채 해변에 드러누워 자는 것이라고.
-그럼 술에 깨어난 다음엔 무얼 할 건데? 무얼 할 수 있는데?
-다시 값싼 술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거지.
그의 모습 속엔 청년과 소년이 동시에 들어 있었다.
-인생 맨 끝에 청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나는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지금의 우리 얼굴이 노인의 얼굴이겠지.
그의 늙은 얼굴도 나의 늙은 얼굴도 상상이 되질 않았다.
-누군가 약속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말이야.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쫓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나면 다른 것들이 온다고 말이야. 이러느니 차라리 인생의 끝에 청춘이 시작된다면 꿈에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한 대의 버스도 보이지 않는 버스정류장 앞을 지났다.
-그렇지 않아?
그가 나에게 부질없는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가장 젊은 얼굴로 죽음을 맞이하고 가장 늙은 얼굴로 지금 시간을 보내게 될 텐데, 그건 괜찮아?
그가 문 닫힌 주얼리 상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은 못 해봤어.
나도 인생의 끝에 청춘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못 해봤다. 나는 그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아닌 말을 중얼거렸다.
-다들 어떻게 견기도 있는지 궁금해.
말을 뱉어놓고 보니 단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또다시 윤미루의 얼굴도.
가끔은 왜? 라고 묻지 않는 것 그 자체가 고마울 때가 있다. 그는 왜 집에 빨리 가고 싶지 않았는데? 라고 묻지 않았다. 그가 왜? 라고 물으면 대답이 궁한 참이었다.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것,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가깝게 해준다고 여겼던 적이 있었다. 가까워지기 위해서 내키지 않는 비밀을 털어놓은 적도.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말로 꺼내기 어려웠던 소중했던 비밀이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 다른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알았을때의 상실감.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은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가난해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도 같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은 오히려 침묵속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기쁨이지만은 않을까. 왜 슬픔이고 절망이기도 할까.
윤교수님 말씀이 생각났다. 사람은 모두 다 자기 방식의 가치기준이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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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가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그거면 충분해, 를 주문처럼 두세 번 반복하곤 해.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종종 들려주었던 물을 건너는 인물 크리스토프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자 하니다.
우리는 지금 깊고 어두운 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엄청난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강물이 목 위로 차올라 가라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틈 그만한 무게의 세계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불행히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의 질감을 지닌 실종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다시 망설였다간 그 문을 열어보지 못할 것 같아서 확 열어버리고 문 뒤를 돌아다보았네, 골목을 다 내려가서 확 깨우쳐진 것, 내가 그 방문을 밀었을 때 뭔가에 닿은 듯한 그 느낌이 맞더군. 이런 얘기를 하게 되다니, 그녀가 거기 있었네, 문 바로 옆 벽에. 목을 매고서.
윤교수와 나와 윤은 하얀 눈이 쌓인 마당이 어두워지는 걸 바라 보고만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윤교수가 입을 열었다. 그때 내가 보았던 관경을 내가 어찌 다 잊겠나. 바래긴 해도 잊히지 않아. 그러니 자네들보고 잊으라고 하지는 않겠네. 생각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더이상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생각해. 이 부당하고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질문하고 회의해. 만일 내가 그녀의 편지에 쓰인 날짜에 제대로 도착했다면 나는 그녀를 살릴 수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녀의 죽음은 결정된 것이었고 다만 그녀는 나를 그녀의 죽음의 첫 입회인으로 맞이하고 싶었던 것일까. 알 수 없네... 인간은 불완전해. 어떤 명언이나 교훈으로도 딱 떨어지지 않는 복잡한 존재지. 그때 나는 뭘 했던가? 하는 자책이 일생동안 따라다닐걸세. 그림자처럼 말이네. 사랑한 것일수록 더 그럴거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절망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다만 .... 그 절망에 자네들 영혼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라네.
학생은 나의 이십대 시절에 비추어 지금 이십대들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게, 함께 있을 때며 매순간 오.늘.을.잊.지.말.자. 고 말하고 싶은 사람을 갖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여러분은 언제든 내.가.그.쪽.으.로.갈.게.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이 소설에서 어쩌든 슬픔을 딛고 사랑 가까이 가보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를, 비관보다는 낙관 쪽에 한쪽 손가락이 가 닿게 되기를 , 그리하여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언젠가'라는 말에 실려있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꿈이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 새벽빛으로 번지기를....
2010년 5월 신경숙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