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시집] 찬란 _ 이병률

by yoni_k 2013. 1. 30.











제1부
기억의 집

햄스터는 달린다

자상한 시간
내가 본 것
거대한 슬픔
생활에게
이 안
새날
밑줄
그런 시간
바람의 날개
찬란

제2부
창문의 완성
사랑은 산책자
사과나무
모독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일말의 계절
다리
시인은 국경에 산다
무심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삼월
망가진 생일 케이크
밤의 힘살
얼굴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울기 좋은 방
고양이가 울었다

제3부
마음의 내과
왼쪽으로 가면 화평합니다
팔월
절연
불편
달리기
슬픔의 바퀴
별의 자리
굴레방 다리까지 갑시다
기억의 우주
입김
좋은 풍경
화사한 비늘
유리병 고양이

제4부
있고 없고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겨울의 심장
길을 잃고 있음에도
굵은 서리
열차 시간표
마침내 그곳에서 눈이 멀게 된다면
붉은 뺨
불량한 계절
심해에서 그이를 만나거든
봉지밥
마취의 기술
진행의 세포

















_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_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은 할머니한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는데


또 오기나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꽃 향은 두고

술 향은 데리고 간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집에 가라는 할머니의 말


신에게 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 잔 부어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

























_

사랑은 산책자



마음이 마음을 흠모하는 것

줄 서는 것 떠드는 것

시간이 시간을 핥는 것


서서히 차오르는 것

그러고도 모른 체하는 것

소멸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


그러니까 뼈를, 그것도 목뼈를 살살 분질러뜨리는 것

서서히 떨어지는 속도를 보이는 것


새를 참견하는 것

주책없이 경치에 빠지는 것

장막 하나를 찢어 지독하게 덮어버리는 것

견딜 수 없이 허우적대는 것이 스스로의 요구인 것


의욕하자니 힘이 되는 것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방향을 얼버무리는 것


모퉁이를 돌기 위해 짐을 꾸리거나

주변을 무겁게 하지 않는 것

주소를 버리고 눈을 감는 것


사랑은 산책하듯 스미는 자.

산책으로 젖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