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ile9.uf@18147C3B4FC363982EA49A.png"
할머니가 말하셨다
아주 사소한 일
바늘에
실 꿰는 것도 온몸으로 하거라
요즘은 바늘구멍이 안 보여
*
정신병원은 화려하다
나는 황제다 나는 육군소장이다
나는 UN 사무총장이다
나는 가수 박훈아다
나는 신이다
나는 미스코리아다
나는 탤런트 김보길이다
정신병원은 정신병원의 별관이다
*
장날 파장 때
지난해 죽은 삼만이 어미도
얼핏 보였다
저승에서도 장 보러 왔나 보다
*
서시베리아 저지대
에니세이 강 상공을 지나간다
오브 강
토볼스크 쯤인가
옴스크 쯤인가
고도 1만 킬로미터 창 안의 나에게
저 아래
한 유리창 햇빛이 반사되어 날아왔다
3초쯤이 전부였나
곧 우랄 산맥 상공을 지나갔다
잘 있게
내 인사는 언제나 늦어버렸다
이미 그 힘찬 햇빛은 없어졌다
*
전과 12범 살인강도에게
세 살 때가 있었다
발가벗고 미쳐 날뛰는 연산군에게
네 살 때가 있었다
쥐암쥐안 한 살 때도 있었다
*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들녘을
물끄러미 보다
한평생 일하고 나서 묻힌
할아버지 무덤
물끄러미 보다
나는 주머에 넣었던 손을 뺐다
*
어쩌란 말이냐
복사꽃잎
빈집에 내내 날아든다
*
봄바람에
이 골짝
저 골짝
난리 났네
제정신 못 차리겠네
아유 꽃년 꽃놈들!
*
어쩌자고 이렇게 큰 하늘인가
나는 달랑 혼자인데
*
친구를 가져보아라
적을 안다
적을 가져보아라
친구를 안다
이 무슨 장난인가
*
아무래도 미워하는 힘 이상으로
사랑하는 힘이 있어야겠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는
사람 살 만한 아침이 있다 저녁이 있다 밤이 있다
호젓이 불 밝혀
*
고군산 선유도 낮은 수평선
해가 풍덩 진다
함부로 슬퍼하지 말아야겠다
*
겨울바다에는
헤어진 사람이
가거라
지금 뜨거운 사랑보다
지난날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이
가거라
*
무욕만한 탐욕 없습니다
그것말고
강호 제군의
고만고만한 욕망
그것들이
이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진리입니다
자 건배
*
나는 고향에서
고국에서
아주 멀리 떠난 사람을 존경한다
혼자서 시조가 되는 삶만이
다른 삶을 모방하지 않는다
스무 살 고주몽
*
비 맞는 풀 춤추고
비 맞는 돌 잠잔다
*
거짓말을 할 수 없구나
그믐밤
그믐달 하나
*
자비라는 건
정이야
정없이
도 있다고?
그런 도 깨쳐 무슨 좀도둑질하려나
*
사람들은 이야기함으로써
사람이다
어이 나비 타이 신사!
그래 졸지 말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좀 해보아
*
지난여름 탱크가 지나간 자리에
올가을 구절초 꽃 피어났네
*
못내 아침이슬이면
더이상 바랄 나위 없다
거미줄에 실려 반짝이는
아침이슬이면
더이상 할 일이 없다
순아 옥아
쨍쨍한 하루 공쳐도 좋아
*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누구와 만나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솜구름 널린 하늘이더라
*
갈보도 좋아하네
꽃 좀 봐
열네 살 선희도 좋아하네
꽃 좀 봐
*
순간에 대해서 좀 언급한다. 나도 누구도 매순간의 엄연한 기운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 자체가 변화 미분들의 순간을 이어가는 것 아닌가.
그 순간들이 사물이나 현상 그리고 나 자신의 심성의 운율에 끊임없이 닿아오면서 어떤 해답을 지향한다. (아니 그 해답이란 이루어지자마자 문제의 시작이다.)
그럴 때의 직관은 그것이면 더 바랄 나위 없는 순진무구이다.
그 동안 오래 공부한 시간론으로서의 '찰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찰나 중에 9백 생멸이 있다는 것으로 말하다가는 수습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눈 깜짝할 사이라는 그 순간의 어여쁜 의미가 세상과 맞으리라 여겼다.
순간 속의 무궁!
이런 경계란 무릇 상상 속에 잠겨 있는 것이겠지만 하나의 직관은 꽃과 꽃을 보는 눈 사이의 일회적인 실체를 구현하는 것 같아서 시집의 이름으로 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