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구본형 선생님의 큰딸 구해린 님이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함께 해준 분들에게 전하는 감사 편지입니다.
3월 초의 일입니다.
그날은 오랜만에 따뜻한 봄햇살이 느껴지던 이른 봄날의 늦은 오후였습니다.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계셨고
저는 아버지 옆에 앉아서 뺨을 쓸어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마른 입술로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내 인생은 그런대로 아름다운 인생이었다..."
먼저 떠나보냈던 형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 보았던 형은, 형수와 두 딸을 정말로 사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형은 없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행복할 것이야.
너희 엄마가 걱정이다.
엄마는 씩씩해 보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구절도 있었고, 들릴듯 말듯하게 말씀하셨지만
저는 되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오롯이 아버지와 단둘이서 보내는 늦은 오후에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입술을 달싹이며 이야기 하시다가 다시 편안하기 잠속으로 빠져드십니다.
저는 이불을 덮어드리고 잠든 아버지의 이마와 콧날을 바라봅니다.
긴 겨울동안 느낄 수 없었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면서
그렇게 짧지만 아름다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는 그 순간이 이렇게 빛나는 순간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장례식장을 찾아주시고 아버지의 명복을 빌어주신 여러분,
아버지와 함께 소통했던
둘만의 비밀, 둘만이 공유하는 아름다운 순간이 있으실 겁니다.
혹은 책을 통해 아버님을 만나신 분들은
어느 한구절에서 아버지와 깊이 마주했던 순간이 있으실 겁니다.
이제는 비록 얼굴을 만지고 마주할 수는 없지만
그 아름다운 순간을 되새기며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명복을 빌어주신 모든 분들께
가족을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희 아버지의 인생은 그런대로 아름다운 인생이 아니라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이었음을 여러분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마당에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려 하고 있어서
아버지 영정사진을 의자에 앉히고 목련을 보여드렸습니다.
생전에 참으로 사랑하던 장소였습니다.
따뜻한 모닝커피도 한잔 뽑아드렸습니다.
봄 하루가 이렇게 지나갑니다.
사랑해마지 않았던 봄날이가슴 먹먹하고 슬프게 지나가지만
아버지가 원하시는 건 이봄을 그저 슬프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따뜻한 봄날을 만드는 것임을 알기에
내년 봄은 좀 더 씩씩하게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2013년 4월 18일
큰딸 해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