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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순간의 꽃 _ 고은

by yoni_k 2012.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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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쩍새가 온몸으로 우는 동안
별들도 온몸으로 빛나고 있다
이런 세상에 내가 버젓이 누워 잠을 청한다












*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

할머니가 말하셨다

아주 사소한 일

바늘에

실 꿰는 것도 온몸으로 하거라


요즘은 바늘구멍이 안 보여










*

정신병원은 화려하다

나는 황제다 나는 육군소장이다

나는 UN 사무총장이다 

나는 가수 박훈아다

나는 신이다

나는 미스코리아다

나는 탤런트 김보길이다


정신병원은 정신병원의 별관이다






*

장날 파장 때

지난해 죽은 삼만이 어미도

얼핏 보였다

저승에서도 장 보러 왔나 보다








*

서시베리아 저지대

에니세이 강 상공을 지나간다

오브 강

토볼스크 쯤인가

옴스크 쯤인가

고도 1만 킬로미터 창 안의 나에게

저 아래

한 유리창 햇빛이 반사되어 날아왔다


3초쯤이 전부였나


곧 우랄 산맥 상공을 지나갔다


잘 있게

내 인사는 언제나 늦어버렸다

이미 그 힘찬 햇빛은 없어졌다









*

전과 12범 살인강도에게

세 살 때가 있었다

발가벗고 미쳐 날뛰는 연산군에게

네 살 때가 있었다

쥐암쥐안 한 살 때도 있었다










*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들녘을 

물끄러미 보다

한평생 일하고 나서 묻힌

할아버지 무덤

물끄러미 보다


나는 주머에 넣었던 손을 뺐다














*
어쩌란 말이냐

복사꽃잎

빈집에 내내 날아든다










*

봄바람에

이 골짝

저 골짝

난리 났네

제정신 못 차리겠네

아유 꽃년 꽃놈들!














*

어쩌자고 이렇게 큰 하늘인가

나는 달랑 혼자인데












*

친구를 가져보아라

적을 안다

적을 가져보아라

친구를 안다


이 무슨 장난인가















*

아무래도 미워하는 힘 이상으로

사랑하는 힘이 있어야겠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는

사람 살 만한 아침이 있다 저녁이 있다 밤이 있다


호젓이 불 밝혀









*

고군산 선유도 낮은 수평선

해가 풍덩 진다


함부로 슬퍼하지 말아야겠다











*

겨울바다에는

헤어진 사람이 

가거라

지금 뜨거운 사랑보다

지난날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이

가거라









*

무욕만한 탐욕 없습니다

그것말고

강호 제군의

고만고만한 욕망

그것들이

이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진리입니다


자 건배











*

나는 고향에서

고국에서

아주 멀리 떠난 사람을 존경한다


혼자서 시조가 되는 삶만이

다른 삶을 모방하지 않는다


스무 살 고주몽




















*

비 맞는 풀 춤추고

비 맞는 돌 잠잔다












*

거짓말을 할 수 없구나

그믐밤

그믐달 하나

















*
자비라는 건 

정이야


정없이

도 있다고?


그런 도 깨쳐 무슨 좀도둑질하려나












*

사람들은 이야기함으로써

사람이다


어이 나비 타이 신사!

그래 졸지 말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좀 해보아











*

지난여름 탱크가 지나간 자리에

올가을 구절초 꽃 피어났네











*

못내 아침이슬이면 

더이상 바랄 나위 없다

거미줄에 실려 반짝이는

아침이슬이면

더이상 할 일이 없다


순아 옥아

쨍쨍한 하루 공쳐도 좋아








*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누구와 만나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솜구름 널린 하늘이더라












*

갈보도 좋아하네

꽃 좀 봐

열네 살 선희도 좋아하네

꽃 좀 봐














*

순간에 대해서 좀 언급한다. 나도 누구도 매순간의 엄연한 기운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 자체가 변화 미분들의 순간을 이어가는 것 아닌가.

 그 순간들이 사물이나 현상 그리고 나 자신의 심성의 운율에 끊임없이 닿아오면서 어떤 해답을 지향한다. (아니 그 해답이란 이루어지자마자 문제의 시작이다.)

 그럴 때의 직관은 그것이면 더 바랄 나위 없는 순진무구이다.

 그 동안 오래 공부한 시간론으로서의 '찰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찰나 중에 9백 생멸이 있다는 것으로 말하다가는 수습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눈 깜짝할 사이라는 그 순간의 어여쁜 의미가 세상과 맞으리라 여겼다.

순간 속의 무궁!

이런 경계란 무릇 상상 속에 잠겨 있는 것이겠지만 하나의 직관은 꽃과 꽃을 보는 눈 사이의 일회적인 실체를 구현하는 것 같아서 시집의 이름으로 삼고 말았다.